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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부의 성립과 항일독립운동 53 일본군 수비대의 군용버스를 습격하거나 환인현 우 편국의 수송차를 습격해 중요 기밀문서를 확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35년 9월에는 조선혁명군 제1사 사령 한검추(韓劍秋, 본명 최석용)가 민중자위군의 왕봉각부대와 연합해 ‘한중항일동맹회’를 조직하고 통화현성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는 등 중국의용군과 의 연합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한편 1933년을 전후해서는 그동안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합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인식을 나타내고 있었다. 국내언론에서는 양세봉이 ‘적화선전 중’이라고 하거나, 국민부에서 는 장교회의를 개최하고 공산당과 합세할 것을 결의 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또한 양세봉이 중국공산당 과 밀접하게 연락을 취하며 암암리에 활동 중이라고 하거나 남만주의 동변도(東邊道) 지역에 산재한 조선 혁명군이 공산진영과 제휴한 후 국내에까지 격렬한 선전문을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1935년 4월 중순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활 석은 통화현 북쪽 강산령(崗山嶺)에서 동북인민혁명 군 제1군 양정우(楊靖宇) 부대와 연합작전을 전 개하 였다. 1936년에도 조선혁명군 4중대장 김윤걸 부대 가 양정우 부대와 환인현 결석령에서 일본 군경 합 동 환인경비대를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1938년 2 월에는 환인현 우모령(牛毛嶺)에서 조선혁명군의 박 대호, 최윤구, 최기홍(崔基弘) 등 60여명의 대원들이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일본의 공세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의 연합을 강화해 갔던 것이다.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만주 독립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숭실대 강사 를 거쳐 숭실대 사학과 교수, 인문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930년대 재만  조선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과 한 · 중연합작전의 동향 - 국내언론의 보도 내용과  경향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 ; 『3 · 1 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독립기념관, 2008 및 『서울 2천년사』(공저), 서 울역사편찬원, 2015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필자 황민호 관전현 하루하진(河露河鎭) 사도구 야산 기슭에 있는 양기하 등 조 선혁명군 주둔 막사터(독립기념 제공). 1933년 1월 일본 경찰의 기 습공격을 받고 양기하 등 조선혁명 대원들이 전사 순국한 곳이다. 1932년 4 · 5월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일 본군과 일제의 괴뢰 만주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고 두차례 점령 한 신빈현 영릉가(永陵街)의 현재 모습(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