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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설 선생 53 항일민족운동의 전개 1895년 8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민씨를 참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이 설은 상소를 올려 이를 ‘역적의 변란’으로 규 정하고 성토하였다. 더욱이 단발령이 내리자 그는 김복한 등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를 찾 아가 창의할 것을 권하였다. 이설은 이승우 에게 창의할 것을 밤새 권하였으나 듣지 않 자 술잔을 던지고 나와 김복한을 만난 자 리에서 “이승우가 죽음을 무서워하니 더불 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상소하여 역적 을 토벌할 따름이다”라고 상소의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11월 29일 전 영 장 홍건과 함께 다시 홍주부로 들어가 이 승우에게 거의(의병 봉기)를 종용하였다. 이승우가 끝내 반대하자 충남 결성의 집으 로 돌아와 의병을 준비하였다. 다음날인 12월 1일 드디어 내종제인 김 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청양의 유생 안창 식·안병찬 부자와 채광묵, 부여의 이상린· 이상천 형제, 홍주의 이근주, 홍산의 송병 직, 정산의 이창서·정제기, 대흥의 박창로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주부 관내에 집결하 였다. 김복한 등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체포하여 구타하면서 이승우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결국 이승우는 창의할 것을 결정하고 관내에 창의소를 차렸다. 이설은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장계와 격 문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그의 각오는 비장했다. 일의 추세에 대하여 염 려하는 안병찬에게 “이 일은 천지가 다하고 귀신에게 질정을 하여 만고에 뻗치고 백세를 기다려도 큰 의리임이 틀림없다”라고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12월 4일 낮 그는 김복한과 함께 장교 유복길의 집 에서 의병의 일을 논의하던 중 순검 김영준 이설의 건국공로훈장증(국가보훈부 제공) 이설의 문집 『복암집(復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