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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근대 대구의 애국계몽운동과 그 한계 53 ● 달성친목회,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태어나다 달성친목회는 1908년 9월 5일 이근우·김용선 등 이 대구를 중심으로 청년의 교육·실업 장려를 위해 조직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 망한 청년들을 단결케 하여 비밀리에 반일사상을 고 취하고 있었다. 달성친목회의 활동은 교육과 실업 장려에 역점을 두었다. 1908년 3월 결성된 교남교육회와 연결된 활 동, 그리고 그 하부 조직인 법률야학강습소·하기강 습소·청년체육구락부 등을 통한 계몽과 교육 활동에 치중하였다. 이에 대해 교남교육회가 달성친목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비록 교육과 친목이 그 이름은 다 르나 장려하는 것은 같다.”고 하였다. ● 달성친목회, 독립운동 단체로 다시 태어나다 달성친목회는 국권상실 이후 지하에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1911년 서상일이 윤창기 · 이시영 · 박영모 등과 함께 상업 시찰을 명목으로 만주와 노령을 여 행하며 국외의 독립운동 상황을 둘러보고 귀국한 이 후, 1913년 9월 21일 달성친목회를 비밀결사로 재 편성하였다.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사건’ 예심 과 정에서 제출된 대구경찰서 순사 박준영의 「복명서」 에 의하면, 서상일은 “대구로 돌아와 친목회와 같은 조선인 청년 단결기관이 폐멸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 하여 다시 이근우 · 정운일 · 서창규 · 서기수 등이 서로 모의하여 친목회 재흥을 기도하고 널리 동지 및 지 방 인사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달성친목회를 재흥케 하여 조선청년을 규합하고 암암리에 배일사상을 고 취하였다.”고 하였다. 1913년 9월 달성친목회는 서상일 등에 의해 비밀 결사로서 재편되어 활성화되었고, 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대구시 남구 앞산에 있는 안일사 대웅전(독립기념관 제공). 1908 년 대구에서 결성된 달성친목회가 1913년 시회(詩會) 형식을 빌 어 대구 안일암(현재 안일사)에서 재건되었다가 1915년 이곳에 서 조선국권회복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1910년대 대구를 비 롯한 영남지역 인사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조선국권 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하였다. 달성친목회의 청년체육 활동 사실을 보도한 『황 성신문』의「대구의 청년체육」기사(191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