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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기간(1919~1923년) 신채호의 민족자결주의 이해와 독립운동론 적용 53 다. 따라서 월슨의 14개조 원칙에 대한 당시 한국인 들의 이해 방식은 신채호에게도 크게 차이 없이 나 타나던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채호가 파리강화회의를 대상으로 하 는 외교독립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던 까닭은 아 시아의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공평하게 적용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 비관적이었기 때문이 다. 비록 미·일의 참전으로 세계대전이 되었다하나, 주된 전장은 유럽이었고, 파리강화회의 또한 전쟁의 본래 목적에 충실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윌 슨조차도 파리강화회의의 목적이 전승국의 식민지 를 처리하는데 있음을 명백히 했다. 신채호는 『신대한』 창간호에서 “전후 몇몇 나라 가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독립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평화의 봄볕’, 즉 민족자결주의의 혜택이 모든 민족 에게 골고루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또 한 파리강화회의는 “평화의 명의와 실제가 다 부합 하지 않는다.”라고도 평가했다. 이는 신채호 역시 당 시 파리강화회의에서 적용되었던 민족자결주의의 범위가 유럽 내 신생 독립국과 새롭게 개편된 몇 개 지역으로 한정된다고 파악한 것으로, 이러한 이유에 서 신채호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의논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신채호의 반대는 당 시 한국인들이 생각했던 국제정치 속에서 민족자결 주의가 가진 의미 자체를 부정하였기 때문은 아니었 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파리강화회의의 후속으로 개최된 워싱턴회의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신채 호는 워싱턴회의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 것을 거듭 촉구했다. 그가 주필이던 『대동(大同)』 6호 (1921. 8. 5)의 사설을 살펴보면 신채호에게 ‘전쟁 당 사자들 간의 문제가 중심이었던 파리강화회의와 달 리 워싱턴회의를 통해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 시아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질 것이고, 이 과정 에서 한국인들도 발언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판 단이 있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당시 신채호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군사통일주비 회를 중심으로 반(反)임시정부 노선에 매진하던 때 신채호의 북경 거주지 터로 추정되는 금시방가 21호 입구(2019 년 조사,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파리의 한국민 대표단과 프랑스인 건물 주인 부부. 앞줄 왼쪽이 여운홍, 오른쪽 끝이 김규식,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조 소앙(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