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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신흥강습소의 시련과 위기의 극복 1911년 서간도 일대에 몰아친 대 흉년, 풍토병, 중국인의 배척과 토지 매매 금지, 일제의 감시와 탄압 등으 로 어려움을 겪었고, 105인 사건으 로 독립자금 지원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경학사가 해산되자, 우당 이 회영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 로 잠입하고, 이동녕은 연해주 블라 디보스톡, 이시영은 봉천성 심양으 로 이주하였다. 서간도 신흥강습소를 지키려는 이 상룡, 이석영, 김동삼, 김창환, 윤기 섭, 허혁 등 혁신유림과 독립운동가 들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지속하기 위해 1912년 통화현 광화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하여 부민단을 조직하였다. 이상룡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광업사, 대사탄 농장 등을 설립하고, 이관직과 정도순을 국내로 파 견 하였다. 그리고 신흥학교 훈련감 김창환, 교감 윤기섭 등은 유하현 일대 한인마을을 돌아다니며 독립 군 양성을 역설하며 지원금을 모아 신흥무관학교 교육을 계속 유지하였다. 부민단 본부는 통화현 합니하에 두었으며, 부민단 중앙부서는 단장 허혁, 부단장 김동삼, 서무 김형 식 이 취임하여 학생모집과 훈련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3.1운동 실패로 절망에 빠진 우리민족의 독립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다. 1911년 6월 10일 중국인 옥수수창고를 빌려 설립한 신흥강습소 터 1911년 6월 10일, 만주 망명 독립지사와 가족 450여 명이 모여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 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빌려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열렸다. 중국인들과 일제의 의혹 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 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 독립전쟁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러한 목적을 최초로 실행한 사업이 신흥강습소의 설 립으로 이어졌고, 무관학교로 발전하는 대장정의 출발점이었다. 피와 땀과 눈물로 세운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의 독립군 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