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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박은식(朴殷植) 선생 53 사구시 학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82년에 상경하여 임오군란을 목도하였 고, 시무책을 정부에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 지 않자 낙향하여, 평북 태천에 사는 박문일 (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 연구에 몰 두하였다. 1885년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특선으 로 뽑혔다. 그 후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 혁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陵參奉)을 한 것이 관직 생활의 전부였다. 이 무렵 주자 학이 경지에 도달하여 서북지방은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유학자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 졌다. 40세(1898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독립협 회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을 갖기 시작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가입, 황성신문 주필 등 교육 · 구 국계몽운동 1898년 9월 남궁억, 유근, 나수연 등이 『황 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자 장지연과 함 께 주필(논설기자)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 제 해산당한 후인 1900년(42세)부터 성균관 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 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04년 7월 배설 (Ernest Thomas Bethell)과 양기탁 등이 창 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을 지 냈다. 1905년 11월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국권 을 침탈했다. 이를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의 논설을 실은 황 성신문은 정간되 었다가 1906년 2 월에 복간 되었는 데, 1910년 8월 국 권 피탈 시까지 황 박은식 선생 초상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앞에 2015년에 세워진 박은식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