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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박재혁(朴載爀) 의사 53 부산상업학교 재학 시절부터 독립운동 모색 박재혁(朴載爀)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범일동에서 아버지 박희선(朴喜善)과 어머니 이치수(李致守) 사 이의 독자로 태어났다. 이름의 한자 표기가 다른 재혁(載爀 · 在赫 · 在爀)으로 나오는 자료 들도 있다. 1907년 범천동(凡川洞)의 사립 육 영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5월 국채보상 의연금 21전을 냈다. 1909년 부친이 별세하여 가정 형편이 어 려워졌지만,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학업을 계 속하였다. 1911년 3월 육영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들어가 1915년 3월 제4회로 졸업하였다. 상업학교 시절에 최천택(崔天澤) · 오재영(吳哉永)과 교유하며 의형제를 맺고, 이후 항일독립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재학 시절인 1913년 최천택·김병태金(鉼 泰)·박흥규(朴興奎) 등과 함께 대한제국기의 보통교과용 국한문본 도서였던 현채(玄采)의 핵심공적 1919년 3 · 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0년 9월 14 일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 本秀行) 및 순사 2명을 폭 살하고 체포되어 사형선고 를 받았다. 이듬해 사형집 행 전에 옥중에서 단식 순 국하였다. 주요약력 ● 1895년 5월 17일 부산 출생 ● 1912년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시 『동국역사』를 등사, 비밀리에 배포 ● 1913년 구세단을 조직해 활동 ●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 가입 ● 1920년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경유 부산에 도착,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 ● 1921년 5월 11일 사형집행 전 옥중에서 단식 순국 ■ 건국훈장 독립장 박재혁(朴載爀) 의사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사형선고받고 감옥에서 단식 순국 부산상업학교 구세단 독립운동 상하이에서 의열단 가입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 다.” - 박재혁 선생, 옥중 발언에서(1921) - 글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