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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윤희순 선생 53 포되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 병운동이 일어났다. 춘천에 있던 시아버지 유홍석도 춘천유림들과 함께 이소응(李昭應) 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운동에 나섰 다. 윤희순이 의병운동에 뜻을 둔 것은 이 때 부터였다. 윤희순은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 을 요구했다. 그리고 ‘안사람 의병가’를 지 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반대하 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열성에 친척들 이 먼저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차츰 반대 하는 사람들도 찬성하게 되어 의병들이 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30여 명의 여성의병 조직, 의병가도 지어 1907년 일본이 한국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고종(광무황제)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유홍석은 춘천에서 유중 악, 유영석, 유제곤 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윤희 순은 초기 을미의병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후기 춘천의병에 참 여했던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 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 76명으로부터 군 자금 355냥을 모집하였다. 이 자금으로 탄환, 유황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 였다. 여성의병은 의병 취사와 세탁을 도맡 아 하는 등 의병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 다. 이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 훈련에도 참가 하였다. 선생은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에 나 서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시아 버지 유홍석은 크게 실망하여 가족과 함께 자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아들 유제원 등이 적극 만류하며 중국 요동(遼東, 남만주) 으로 건너가 후일을 기약하자고 권유하였다. 윤희순이 지은 의병 가사 윤희순 의병가사집(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