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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순애 선생 53 망함에 따라 결혼하게 되었다. 특히 이 결혼 은 정신여학교 동창으로 학창 시절부터 가까 웠던 조은수가 임종 전에 “꼭 김순애와 결혼 하라”라고 부탁하여 성사되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이어 1918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은 당시 약 소민족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여운형(呂運 亨) 등 한국 청년들도 이를 기회로 신한청년 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김규식과 함께 상하 이(上海)로 갔다.1919년 1월 하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에 입당하여 당내 유일한 여 성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월 말 김규 식이 파리로 출발했을때, 선우혁(鮮于爀) · 김 철(金澈)·서병호 등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 다. 2월 중순경 부산에 도착한 뒤 국내의 중 요인사와 접촉하여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및 한국 독립 선전을 위한 동조 시위를 촉구 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전달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서 함태영 목사와 평 양 지역 주요 인사들에게도 거사 계획을 비 밀리에 전하였다. 이후 일제에게 발각될 것 을 우려해 만주로 향하였다. 2월 28일 중국 여자로 변장하여 압록강을 넘은 뒤 북만주 흑룡강성(黑龍江省)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활동하던 친오빠 김필순을 찾아갔다. 여기 서 중국인 유지의 협조를 얻어 한인 동포들 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 추진하 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영사관에 연행 취조를 당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풀려 나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 조 직 독립운동 전개, 독립전쟁 대비 간호 원 양성도 1919년 4월 11 일 상하이에서 대한 민국임시정부가 수 립되고,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 는 애국부인회가 서 울과 평양 등지에 조 직되었다. 이에 같은 해 7월 이화숙·이선 실 · 강천복 · 박인선 · 오의순 등과 같이 ‘대한애 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주 된 활동은 임시정부 지원이었다. 7월 13일 이희경 · 안창호 · 안정근 등의 발의로 임시정 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독립전쟁으로 인한 전상병(戰傷兵)의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대 한적십자회가 상하이에서 복구되자, 여기에 도 참여하였다. 사검(査檢) · 이사로 활동하면 서 대한적십자회의 선언을 발표하고 국제적 십자 연맹에 대표를 파견하여 대한적십자회 김규식과 김순애의 결혼 기념사진 (1919.1.19) 김순애가 오빠 김필순에게 보낸 편지(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