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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양진여 의병장 53 군수품 모집 · 징수 활동은 계 속되었다. 특히 짚신과 백목 이 중요했다. 이에 따라 의병 부대는 1909년 1월 12일과 18일 광주군 갑마보면 복룡 리 이장 집에서, 2월 하순에 는 광주군 오치면 방축내동 동장 집에서 백목 등을 군수 품으로 징발하였다. 그의 의병부대가 벌인 군자 금 및 군수품 징발 활동은 주로 지방 유지인 동장과 면장을 상대로 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들이 지방 유지로서 봉건 지배층이었던 점 을 감안한다면, 양진여 의병부대의 이러한 활동은 평민 의병들의 반봉건 의식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숨을 내걸고 평민 의병 부대가 실천한 이러한 반일·반봉건 투쟁이야 말로 한말 의병전쟁에 참여한 민중들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 로 평가할 수 있다.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유감” 하지만 평민 의병장 출신 양진여는 그 뜻 을 다 펴기도 전에 일제 앞잡이들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다. 즉 2년 가까운 의병활동과 병으로 향리에 은둔하여 요양하고 있던 중, 1909년 8월 25일 일본 군경에 체포된 것이 다. 이때는 일본군이 이른바 ‘남한대토벌작 전’ 계획을 세우고, “사방에 그물을 치듯이 해 놓고 촌락을 샅샅이 뒤지던” 시점이었다. 이후 양진여는 일제가 사법권을 장악한 뒤 인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 바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 에 불복하여 공소했으나, 대구공소원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고등법원에도 상고했지만, 1910년 4월 기각됨에 따라 교수형이 확정되 었다. 그리하여 1910년 5월 30일 대구형무 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순국 당시에도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 을 이루지 못하고 형을 받고 죽으니 유감”이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아 들 양상기 의병장도 1910년 8월 1일, 대구감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는 점이다. 이처 럼 양진여는 물론 세 아들과 이복 동생 양동 걸도 의병에 참여하여 희생되거나 큰 피해를 입어 온 가문이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 『양진여 · 양상기 부자 의병장 실기』 (노성태 저, 남도일보 제공) 양진여 의병장의 사형 집행을 알리는 관보 (19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