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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가서 군정을 대체할 수 있는 한국민정을 승인해 달라고 국제연합 에 요청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의 단독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루즈벨트 여사, 유엔총회 중 국대표 웰링턴 쿠(顧維鈞),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H. Lie), 유엔총회 필리핀 대표 로물로, 대 만의 장제스 등에게 전달했다. 또한 맥아더에게는 개인적으로 조사차라도 한국을 방문해 주든가 아니 면 자신을 일본에 초청해 달라고 간청했다. 1947년 4월 9일 이승만은 일본을 경유, 맥아더와 회담한 후 중국의 난징[南京]으로 가서 한국 교민들 에게 자신은 미국에서 미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를 조직하는 것을 자세히 논의했고, 이미 결론을 내렸 다고 주장하면서 이번에 귀국하게 되면 곧바로 정부 구성 준비를 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4월 13일 이 승만은 장제스를 방문한 후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맥 아더도 한국 정부가 조속히 수립되기를 희망하고 있 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4월 21일 워싱턴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재 개를 앞둔 미소공동위원회의 업무를 방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의 전 망이 어두워지자 미국은 9월 17일 독립 방안이 포함 된 한국문제를 유엔에 협의 대상으로 제출했다. 유엔결의안과 이승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당선 유엔에 제출된 한국문제는 1947년 11월 14일 유 엔 총회에서 ‘한국 독립문제에 관한 결의안’으로 채 택되었다. 이후 상황 전개는 잘 알려져 있듯 1948년 5월 10일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진행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탄생 한 국회개원일에 이승만은 최고 연령자로 임시의장 에 선출되었다. 국회는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7월 20일 개회되었다. 여기서 국회의장 이승만은 출석의 원 196인 가운데 180표의 압도적 다수표로 대통령 에 당선되었다.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 이승만과 부 통령 이시영은 1948년 7월 24일 정·부통령으로 정 식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1948년 8월 11일 연합국최고사령관 맥 아더에게 앞으로 개최될 독립선포기념식 겸 대한민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기념식장의 하지 장군,  맥아더 원수, 이승만 대통령(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구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광경(뉴스1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