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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은인자중하며 식 민통치에 적당히 타협하기도 했다. 교남교육회 회원은 1910년 5월까지 모두 615명 이었다. 그중 1910년 이후 관직 경력자는 모두 113 명이다. 이것은 회원 615명 중 약 18%에 달하는 수 치이며, 한말의 관직 경력자 50명까지 합하면 163명 으로 약 26.5%에 해당한다. 113명 중 모두 32명이 1910년 10월 1일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가 부임하면서 동시에 임명된다. 일제가 한국을 집어 삼키는 과정에서 제1의 공로자로서 포상을 받 고 있다. 곧이어 1912년까지 49명이 관직에 임명되 어 대부분 초창기부터 친일세력으로 재편성되고 있 어 그 성향은 매우 친일적이었고 관료 지향적이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한 경우도 있었다. 교남교육회의 회원 중 일부 는 일찍부터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국권회복운동 에 투신하였다. 1906년 결성되었던 신민회와 1908 년 9월 결성되는 달성친목회, 그리고 1909년 10월 경 결성되는 대동청년단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교남교육회는 을미의병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상경하는 보수적인 영남유림과 현실을 직시 하여 사상적으로 변신하고 있던 청장년의 계몽적인 유생, 그리고 신학문을 배우는 과정에 있던 학생들 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계몽운동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많은 사 람이 관료 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1910년 이후 회원들의 행동 양식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 재편성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다. 안동 협동학교 교사 김기수 안상덕 관련 보도 기사 「교육계의 동정」(『대한매일신보』, 1910.7.24) 경상북도 안동시 내앞마을 ‘백하구려’ 사랑채 앞의 바위(조선일보 제공). 백하구려는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이 살던 옛 집이다. 김 대락은 안동 혁신유림 류인식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 교사로 사 랑채를 내줬다. 그러나 신학문을 반대한 척사파 의병이 난입하여 교사와 학생을 이 바위 앞에서 살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