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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4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 특집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현실 인식과 대응’ 엄밀히 말해 신채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결정적 으로 갈라섰던 1919년 9월부터 1923년 1월 「조선 혁명선언」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이 시 기 국제정세를 좌우하는 주요 원리였던 민족자결주 의에 대한 신채호의 인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 채호 또한 1920년대 초의 국제정세에 공명(共鳴)했 던 역사 속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민족자결주의 이해는 다른 지식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세기 초까지 먼로주의를 고집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대(對)유럽 중립외교를 유지했던 미국 은 자국의 배들이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연이 어 침몰하게 되자,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했 다. 이때 미국은 ‘근본적인 세계 평화의 정착’을 참전 의 명분으로 내걸었는데, 이에 대한 실천 강령으로 제시된 원칙이 바로 민족자결주의였다. 그렇다면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어떻게 이 해되고 있었을까? 당시 한국인들은 윌슨의 14개조 원칙 중 제5항을 ‘민족자결의 원칙’이라고 번역하 였 고, 또한 14개조 전체의 요점을 ‘민족자결주의’ 한 단어로 요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5조의 문안은 ‘앞 으로 식민지의 주권이 결정될 때 주권을 소유하게 될 정부와 해당 식민지 주민과의 이해관계가 공평하 게 조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제 민족자결주 의의 내용은 식민지의 즉시 독립을 보장한다는 의미 와 괴리가 컸다. 즉 당시 한국인들은 제5조 문항을 ‘민족자결’의 근거로 생각하고, 민족자결주의를 한 국의 독립을 뒷받침하는 개념으로 확장·변용하여 사 용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신채호의 경우에도 『신대한』 창간호(1919. 10. 28.)에서 “윌슨의 십사조 강령이 성포(聲布)되었다. 무엇무엇 도합 십사라하나 실은 민족자결(民族自決) 일구(一句)가 그 강령이다.”라고 하여 윌슨이 주창했 던 14개조 원칙을 ‘민족자결’ 하나의 개념으로 압축 시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채호는 압축된 민족자결 주의 개념을 ‘각 나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데로 자 결하여 자유의 상태를 획득’하는 것으로 이해하였 중국 뤼순(旅順)감옥 수감시 신채호 (국가보훈부 제공) ‘조선혁명선언’ 앞부분 내용(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