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page
52 2024년 6월 Special Theme 제14회 ‘의병의 날’ 기념 특집 ‘대한제국기 후기 의병의 봉기와 일제의 의병 탄압’ 적한 의병들을 색출하는 등 다양한 수법을 사용했다. 또 일본군 제14연대는 1908년 9월 30일부터 약 3 주간 지리산 남방지구의 의병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에는 진주수 비대를 비롯한 제2대대 제6중대 병력이 주력으로 참 여했고, 제3대대 소속 제9중대의 응원 병력이 멀리 부산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일본군의 의병 진압에는 수비대 병력 뿐만 아니 라, 기병대, 경찰, 헌병대 병력이 협동하였으며, 길잡 이로 조선인 순사, 통역이나 밀정, 헌병보조원이 ‘토 벌작전’에 동원되었다. 통상적으로 수비대는 자체 정보 이외에도 각 지역에 주재한 경찰과 의병 활동 에 관한 긴밀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 문에 각 지역 주재소 등 현지 경찰의 정보를 바탕으 로 의병의 수색 및 토벌작전을 진행했다. 이 경우 제 1차적인 정보 제공자는 일제가 곳곳에 심어놓은 밀 정과 마을의 이장, 동장 등이었다. 일본군 제14연대의 ‘토벌작전’ 기간 중 의병과의 교전 회수 총 109회, 그 중 대부분이 경남 서부지역 에서 일어났고 특히 하동과 산청에서 총 교전회수의 50%에 가까운 교전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토벌작 전은 특히 5월부터 8월에 이르는 여름 기간 중 집중 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4개월 동안 일어난 양측간의 교전회수는 63회로 전 기간(19개월) 총 교전회수의 58%에 이른다. 그러나 혹한기인 겨울 중에도 일본 군의 의병 색출과 공격은 끊이질 않았다. 이로 인해 1909년 들어서 경남에서의 의병 활동은 현저히 줄 어들었다. 이즈음 경남 출신을 대표하는 의병장 문 태수는 전북‧경남‧충청의 접경지역을 무대로 활 동하면서 경부선 이원역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의병 투쟁을 벌였으나, 1911년 8월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 어 1913년 2월 옥중 순국하였다. 경남지역에서 일본군의 의병 ‘토벌’이 본격적으 로 시작된 것은 제14연대 연대장이 이끄는 기쿠치 (菊池)토벌대가 지리산 의병세력을 토벌하기 시작한 1908년 2월부터이다. 특히 일본군 제14연대가 진주 수비구를 설치한 1908년 5월부터 진주수비구가 해 체되어 수비구사령부가 광주로 옮겨가기 직전인 같 은 해 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후기 경남 의병 봉기 이후 문헌상의 의병 전사자 총 852명의 약 95%에 해당하는 808명이 1908년 2월 이후 약 9 개월 사이에 희생되었다. 후기 경남의병의 지역적 특성과 의의 경남지역 의병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시 작되었고 저항 강도도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 주된 원인으로는 첫째, 개항장인 부산과 군항인 진해 등 에 일찍부터 일본군이 주둔하여 의병세력의 동태에 대한 감시가 용이했다는 점, 둘째 척사파 유생층의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해 의병운동을 촉발시키는 내 부적 기제가 미약했다는 점, 셋째, 따라서 외부 의병 세력의 영향이 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경남지역 의병세력의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 했다고는 하지만, 경남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에서만 큼은 호남지역이나 경북지역 못지않게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상남도 내 의병운동 의 부침과 지리적 편차는 1908년 1월 13도연합의군 의 서울 진공 실패 이후 의병세력의 남하, 덕유산과 지리산 인근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 일본군의 토벌공세로 인한 경북 의병세력의 남진 등이 원인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