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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4년 3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독립선 언서」에 서명하다 1919년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등 종교계 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 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 여 불교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그 결과 서울 임제종포교당에서 같이 활동했던 백용성(해인사 출신) 선사를 민족대 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남 거창까지 내려가 유림의 거두인 곽종석을 만나 유림측 도 운동에 동참을 유도하였다. 이 해 2월 말 최남선이 기초한 초고를 정서 하며 자신의 의견과 다른 부분은 일부 수정하 였다. 이 때문에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공약3 장 추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는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즉 2 월 28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의 사장 인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했다. 이를 불교계 대표적인 단체(30본사 연합회)가 서울에 세운 학교인 중앙학림(동국 대 전신) 학생 신상완(申尙玩)·김법린(金法麟)· 백성욱(白性郁) 등에게 건네주면서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하 였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및 전 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하 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져온 선언서 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고, 한용운 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하였다. 이에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 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 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의 행동강령을 제시 하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이후 경찰에 체포될 경우에 대비하여 변호사 를 대지 말 것,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보 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의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결국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 했던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 붙잡혔다. 그 는 옥중에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부 민족대표들은 불안과 절망에 빠져 부끄러운 행보를 보인 사람도 있었다. 한용운은 나약한 일부 민족대표들에게 강하게 질책하면서 민 족지사로서의 자존심을 갖도록 요구하였다. 나아가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조선 독립의 서)」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 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하 였다. 이 논설은 비밀리에 감옥에서 유출되어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제25호(1919.11.4)에 수록되었 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을 뛰게 한 기념비적인 선언서로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