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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부의 성립과 항일독립운동 51 한 · 중연합작전의 전개와 사회주의 세력과의 제휴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전쟁 초기부터 국민부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1932 년 1월 이른바 ‘신빈현 사건’을 도발해 조선혁명 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保安),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 장 이종건(李鍾乾) 이하 약 70여명의 국민부 관계 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국민부에서는 곧바로 조직을 정비해 국민부 집행위원장에 양하산(梁荷 山, 양기하),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고이 허, 조선혁명군 사령관에 양세봉(梁世鳳, 본명 양서 봉)을 임명하고 항일무장투쟁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선혁명군 사령관에 취임한 양세봉은 한 · 중연합 작전의 전개를 통해 국민부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 였다. 이는 효과적인 무장투쟁의 전개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재만한인이 일제의 앞잡이라는 중국인 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 략이었다. 양세봉은 1932년 3월 평소에 친분이 있 었던 대도회(大刀會)의 법사(法師) 양석복(梁錫福)과 왕동헌(王彤軒)이 이끄는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 自衛團)에 참여하는 한편, 군관 10명을 파견하고 대 도회가 요구하는 무기를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서 영릉가(西永陵街), 목기(木奇) · 흑우(黑牛) · 상협하(上 夾河)에서 전투를 전개해 승리를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조선혁명군은 당취오(唐聚五), 왕육문 (王育文), 이춘윤(李春潤), 왕봉각(王鳳閣) 등이 지휘 하는 중국 국민당계열을 항일의용군인 요녕민중자 위군의 독자적인 부대로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사 령에는 양세봉, 부사령에는 양하산, 대장 박대호(朴 大浩), 소대장 강옥성(姜玉成) 등을 임명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는 참모 장 김학규(金學 奎)를 환인으로 파견하여 당취 오 등 중국 의용 군 대표들와의 협상을 통해 ‘중 국과 한국의 군 민(軍民)은 절실 하게 연합하여 일치 항전하고 인력(人力)과 물력(物力)을 서로 통용하며, 합작의 원 칙 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공작 을 나누어 맡는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또한 중국측 에서는 향후 조선혁명군의 독립전쟁 수행에 적극적 으로 원조할 것에도 동의하였다. 이날은 윤봉길의사 가 홍구공원의거에 성공한 날이기도 했다. 양측의 연합이 성사되자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를 편성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특무대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서봉(양세봉의  본명) 흉상(중국 요녕성 신빈현, 조 선일보 제공) 요녕성 관전현 하루하진 연강(連江) 사도구(四道溝) 야산에 있는 양 기하 흉상. 이곳은 조선혁명군이 주둔했던 자리로, 그가 일본경찰 과 격전을 벌이다 장렬히 숨진 순국지이기도 하다(세계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