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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설 선생 51 도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설은 이돈필 제문 에서 그를 ‘맑고 총명하며(淸敏) 바르고 강직 하다(耿介)’라고 추모하면서 자기를 아껴 주 던 스승 이돈필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15세 때인 1864년 양부가 관직을 받 고 상경하게 되어 족형인 이위(李偉, 1830~1872)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는 1866년 병인양요에 조정에서 방책을 널 리 구하자 ‘응상동뢰차(凝上冬雷箚)’라는 상 소를 지었으며, 1878년에는 ‘의상척양왜소 (擬上斥洋倭疏)’를 올렸다. 관직이 없어 올려 지지는 못했으나, 이 상소에서 그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점차 득세하는데 척화 (斥和)하는 자들이 도리어 화를 입게 됨을 지 적하였다. 이어서 왜(일본)는 서양의 앞잡이 [‘전도(前導)’]임을 밝히고, 이러한 왜와의 화 친을 주장함은 곧 매국행위임을 천명하였다. 그 뒤 과거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이 설의 관계진출은 학문에 비해 늦은 편이었 다. 33세 때인 1882년에 생원시 복시에 합격 했으며, 1888년 겨울에 알성과 응제시에 합 격하고 다음 해 12월 비로소 식년시 전시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이었다. 비 록 과거에는 늦게 합격했지만, 발표 당일 홍 문관 부수찬(종6품)에 특제되었으며, 다음해 수찬(정6품), 사간원 정언(정6품)에 제수되었 다. 1894년 봄에는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얼 마 후에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일본이 내정개 혁을 강요하자 상소를 올려 이를 거부할 것 을 주청하면서 사임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 는 오히려 동부승지·우부승지를 제수하여 임 금을 보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상소를 올려 ‘소중화(小中華)’의 맥이 끊어지 게 될 것을 염려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일본 과의 전쟁을 결행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상 소를 올린 다음날인 6월 21일 갑오변란이 일 어나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 친일 내각이 조직되는 등 반식민지상태에 빠짐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설은 곧이어 홍주부(지금의 충남 홍성) 일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에 휩싸 이게 되었다. 홍주목사 이승우에게 여러 차 례 편지를 보내어 동학을 배척할 대책으로 병사를 보충할 것과 산성을 수축할 것 등의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이설의 사상 이설은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많이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기호(畿湖)지역의 뛰어난 유학자임을 그의 글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이 이설의 생가 터(충남 청양군,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