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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근대 대구의 애국계몽운동과 그 한계 51 그 외 국민협회 · 대구교풍회 · 유도진흥회 · 경학원 등 유교 관련 관변단체에도 대구지회 출신 인사 8명 이 참여하였다. 국민협회에는 장상철, 대구교풍회에 는 서병규와 정해붕이 부회장, 유도진흥회 경북지부 에는 성주의 이진석·박찬동, 청도의 박병현, 칠곡의 장상철, 그리고 대구의 강해(부회장) · 서병오 · 이덕구· 박기돈 · 이종면 등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경학원에는 회원 박용흠이 강사로 참여하였다. 반면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회원은 윤상태 · 김 재열 · 최해윤 등에 지나지 않았다. 윤상태는 1915년 정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그 통령 이 되어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후원하였으 며, 고령 출신의 김재열은 1915년 1월 조선국권회복 단, 1915년 7월 광복회 등에 참여하다. 그리고 최해 윤은 1919년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과 1926 년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연루되었다. 이와 같이 대한협회 대구지회에서 활동했던 유력 한 부호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기관인 은행, 각종 식민통치기구 및 관변단체에 참여하여 친일행각을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였다. 그 리고 일부 회원은 친일과 민족운동의 경계를 넘나들 며 식민통치에 적당히 타협하였다. 반면 일부 선각 적인 유생들이 직접 민족운동에 뛰어들어 반일세력 으로 성장하였으나 그 세력은 매우 미약하였다. ● 대한협회 대구지회, 안동 협동학교를 공격한 의병을 성토하다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1910년 7월 ‘안동 협동학교 교원 및 생도의 폭도피해사건’에도 적극적으로 개입 하였다. 경북 북부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벌이던 의병장 김 상태 휘하의 최성천이 협동학교를 습격하여 교감 김 기수(金箕壽)와 교사 안상덕(安商德) 등을 총살한 사 건이다. 그 이유는 애국계몽운동과 근대식 교육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학생들의 단발 때문이었다. 대구지회는 1910년 7월 18일 임시총회를 열고 평 의원 이일우 외 13명이 출석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 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一 . 안동협동학교 피해사건에 대하여 가해자인 폭도 의 토벌을 관할 경찰관서에 청구할 것. 一 . 안동에 있는 완고한 양반을 위시하여 경성 방면 에 「성토문(聲討文)」을 배부할 것. 一 . 유족에게 피해자의 장송비(葬送費)의 일부를 거 두어 증여할 것. 一 . 피해자의 유해가 대구에 도착할 때에는 각 학교 생도 및 각 단체원을 동원하여 추도회(追悼會)를 행할 것. 우선 대구지회는 관할 경찰관서에 “가해자인 폭도 의 토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연설회를 개최 하고, 안동지역의 완고한 유림들에 대해 성토문(聲討 文)을 발송하여 여론을 환기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 입하였다.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의병의 무장투쟁에 매우 비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교남교육회, 친일적이고 관료 지향적이었다 1910년 이후 교남교육회 회원들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협력하는 관리가 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직접 민족운동에 뛰어들어 반일세력으로 성장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