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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신규식 선생 51 17세 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하여 관립한어(漢語)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武德)을 쌓게 되었다. 신동으 로 불리며 한학 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 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 고 생각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자결하려 독약 마셨으나 시신경 상한 채 살아나 1905년 을사늑약(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 결되자 육군 참위(參尉)로서 지방군대와 연 계, 대일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전국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 하고,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 식(洪萬植) 등은 자결했다. 민심이 가마솥 끓 듯 펄펄 끓을 때였다. 청년장교 신규식은 서 울의 계동 · 가회동 · 운니동 등의 솟을 대문들 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 듯 소리 질 렀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신규식은 호랑이라도 잡을 듯 거리를 쏘다 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니동 집으로 돌아왔 을 때 그는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흘을 문 걸어 잠그고 굶 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민영환 등의 순 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 내 한 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26세 신규식의 이러한 생각 신규식과 중국 혁명인사 엄주동(오른쪽, 1917년) 대한제국 장교 시절의 신규식(앞줄 오른쪽) 과 신팔균(왼쪽,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