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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기간(1919~1923년) 신채호의 민족자결주의 이해와 독립운동론 적용 51 신채호는 1920년 워싱턴회의에 대 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반 임시정부 노선을 견지하였다. 외교 독립론자들과 신채호의 간극이 민 족자결주의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방식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국제정 세 속에서 독립운동론을 적용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채호가 원했던 민족자결주 의의 독립운동방략 적용은 군사행 동을 통해 민족의 자결능력을 입증 한 이후에 국제사회의 역학관계를  활용하여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1919~1923년 당시 신 채호가 상정했던 이러한 선무장투 쟁 - 후외교 방식의 독립전쟁론은  자신의 투쟁방식에 회의를 품게 되 었던 1924년 가을 무렵까지 이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의 모순처럼 보이는 입장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와 워싱턴을 거치는 두 번의 평화회의 를 통해 세계질서의 재편이 완료되는 1919~1923년의 시기는 세계사 의 결정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앞서 시대를 주도했던 제국주의가 퇴 조하고 세계 패권국가로 미국이 새롭게 부상했다. 러시아는 공산국가 소련이 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국내외에서 각기 가능한 방식으로 독립의 방향을 모색하던 한국 의 민족 지도자들은 전후처리의 원칙으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 슨(Woodrow Wilson)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National Self- determination)’에 희망을 걸고, 앞 다투어 파리강화회의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다툼의 장(場)이었던 파리강 화회의에서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한 독립청원은 안건으 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큰 파문을 몰고 왔던 사건은, 미주 대한인국민회 대 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던 이승만과 정한경이 윌슨 대통령 앞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이었다. 당시 이들에 게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당시 ‘반(反)임시정부 노 선’의 선봉에 서 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그가 썼던 「성토문 (聲討文)」이 가장 두드러졌다. 신채호는 「성토문」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한국이 미국 식민 지가 되고자 한다는 요청을 미국 정부에 제출하는 매국매족(賣國賣族)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당시 신채호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이 외 교사절을 보내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신채호는 ‘중국 춘추시대 초 (楚)가 이웃한 오(吳)의 침입으로 존망의 위험에 처했을 때, 신포서(申包 胥)가 진(秦) 애공(哀公)에게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읍소하여 구원병을 얻어낸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한국의 독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파리강화회의 이후 진행된 워싱턴회의에 대 해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전망을 내 놓았다. 두 회의에 대한 신채호의 입장은 얼핏 보기에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두 회의를 둘러싼 신채호의 심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