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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지섭 의사 51 일 금산구재판소 서기로 재직 중 대한제국이 일본에 멸망한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이날 저녁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은 그에게 상자 하나를 맡기고 객사로 나가 자결하고 말았 다. 집에 돌아와 홍범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 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 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홍 범식이 품고 있던 유서는 일본인이 탈취해 갔 으나, 그에게 미리 맡겨 놓은 것은 장남인 벽 초(碧初) 홍명희(洪命憙)에게 온전하게 건네졌 다. 홍범식의 자결에 큰 감명을 받고 그의 장 례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1911년 9월 영동구재판소 통역생 겸서기 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1913년 1월 공주지방 법원 영동지청(1912년 영동구재판소가 개칭 됨) 서기를 사직하였다. 향리로 돌아 와 우국 동지들과 교유하며 독립운동 의 의지를 세웠다. 1915년 5월 김응 섭이 평양에서 대구로 변호사사무소 를 옮기자 서기로 취직하여 상주출장 소에 근무하였다. 1919년 3 · 1만세운 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로 결심하고 중국을 왕래하였다. 1920년 8월 서울에서 미국 의원단 방한에 조응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 였다. 1921년 만주, 중국 관내, 러시 아 연해주 등지를 왕래하며 동지 규 합에 동분서주하였다. 가을 경 이르 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초겨울 김재봉(金在鳳)과 함께 극동민족대회 대표로 이르쿠츠크에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의열단 가입, 국내외 의열투쟁 참여 1922년 여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 단에 가입하였다. 가입하자마자 곧 대규모 암살 파괴 공작에 참여하였다. 당시 의열단 의 암살 파괴 공작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인들은 6천여 명의 한인 동포들을 무차 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의열단 지도 부는 일본의 만행을 응징하고, 연이은 실패 를 만회할 거사를 추진하였다. 일제의 수도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고 주요 고관을 암살 할 계획이었다. 김지섭은 이를 실행할 의열 김지섭의 상주보통학교 부교원 임명장(19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