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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양진여 의병장 51 에 있는 대치산을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봉기 직후 양진여 의병부대는 바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과감한 활동은 하지 않고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 그것은 이 시기 호남지방 에는 기삼연 창의대장을 중심으 로 하는 유생 의병부대가 ‘호남창 의회맹소’를 조직하여 활발한 활 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 의병부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기 삼연 의병장이 순국한 뒤, 호남창의회맹소가 전남 · 전북 일대로 분산되어 활동하기 시작한 1908년 2월 이후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시기 그의 의병부대가 호남창의회맹소에 참 여했던 전해산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수행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합집산의 유격전술로 일본군 광주수비대 를 습격, 격파 양진여의 의병활동 공간은 주로 광주 · 담 양 · 장성 · 창평 등지였는데, 그 활동 양상은 크 게 세가지 성격을 띠었다. 첫째는 일본 군경 에 대한 직접적 공격, 둘째는 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식민관리의 처단, 끝으로 의병부대를 유지 운영하고 그 전투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군자금 및 군수품 모집 활동이 그것이다.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한인 순사들로 특설 순사대를 편성하여 이들과 함께 의병부대를 추격하였다. 11월 5일부터 광주 · 장성 · 담양 일대에서 감행된 이들의 추격을 따돌리면서, 양진여 의병부대는 전해산·강판열 의병부대 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전해산 · 강판 열 의병부대와 연합의진을 형성한 양진여 의 병부대는 장성 · 담양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어 11월 23일 이들 연합의병 부대는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치산에 주둔하여 광주 탈환작전을 계획하 였다. 광주라는 대도시를 탈환함으로써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나아 가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 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일제 식민침탈 관리 처단, 전투위해 군수품 조달 노력 그러나 이 작전은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공 격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즉 양진여와 전해 산·강판열 의병장이 이끄는 연합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3일 우다(宇田) 특무조장이 거 느린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 다. 이에 맞서 연합의병부대는 대치산에서 3 양진여 재판 판결문(1910년 4월 13일, 고등 법원). 손자 양일룡 씨가 1971년 부산교도소 에서 직접 찾아낸 자료이다. 양진여 의병장의 호를 따서 붙인 광주 ‘서암 대로’(남도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