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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 51 10월 18일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 회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고, 의 장에 선임되었으며, 11월 24일 정의부(正義 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민족 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힘을 기울였 다. 이는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 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정부를 정당 중심으 로 운영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 념상 분화된 좌우 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란  의미를 가졌다. 1926년 10월 안창호와 원세 훈이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한 뒤에 상하이와 난징, 우한과 광저우 로 확산되어 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 직되는 분위기에서 만주 지역에서도 민족유 일당운동이 진행되었다.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 회의를 개최하여,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조직 결성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자, 새로운  통합 방법을 찾아 나섰다. 1928년 7월 삼부 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직전 정의부를 이탈하 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만주 독립운동 전개하다 하얼빈에서 잡혀 옥중에서 순국 1929년에는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 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 위원장에 뽑혔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 역에 국민부(國民府)가 출범함으로써, 민족유 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 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고문을 맡았다.  늘 통합운동의 핵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삼은 결국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공  직후 일본 영사관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같은 안동 출신이자 사돈인 이원일(李源一),  경북 영양군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 (南慈賢)과 항일공작을 추진하려고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붙잡힌 것이다. 하얼빈 주재 일 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 양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마포형무소로  옮겨졌다가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 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평소 그를 존경하 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자신이 머물 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렀 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 서하였다.    안동 내앞마을 김동삼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