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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 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총으로 과녁 맞히는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원들은 독서도 하고 쾌활함을 유지하고 긴 장을 풀기 위하여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 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즐기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멋진 양복을 차 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옷차림을 말쑥하게 갖추었다. 사진 찍기를 아주 즐겼으며 언제나 이 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여겼다. - 님 웨일즈 『아리랑』 중에서 부대가 편성되었다. 대표적인 독립군 부대로는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 서로 군정서, 군무 도 독부, 국민회군, 대한독립청년단, 대한독립당, 혈성단 등이 있었다. 특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 첩은 무장 독립 투쟁사에 길이 남을 명전투였다. 일제가 이 전투에서 패배한 보복으로 간도 지역 동포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집과 농작물을 불태우는 등 온갖 탄압을 가했지만, 무장 독립 투쟁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쉼 없이 전개되었다. 애국지사들은 국내외에서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하거나 침략 행위 에 앞장선 일본인과 친일파를 주살하는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를 의열 투쟁이라 한다. 러시아 블라 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노인단 소속 강우규는 서울역에서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 총독 처단 작전은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 늘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의열 투쟁은 주로 1920년대~193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한국 독립항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항일 투 쟁 방식이었다. 의열단의 목표는 식민 통치와 관련된 기관과 핵심 인물을 응징하는 것으로, 테러와 는 차원이 다른 식민지 해방 투쟁이었다. 의열 단원은 주로 18세에서 26세 사이의 다양한 직업을 가 진 동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조선 총독부와 동양 척식 회사 등 일제의 우리 민족 수탈 기구를 파 괴하고 일제 관료 및 친일파를 처단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현하다 | 의열단 비폭력 평화 시위로 전개된 3.1 운동이 일제의 잔인하고도 폭력적인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낳으 며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하자 독립군들은 독립을 위해 강력한 무장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만 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군 부대와 항일 의열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1920년대 의열 투 쟁에 있어 가장 빛나는 성과를 이룬 단체는 단연 의열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