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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영월엄씨대종회보 43호 을 꾀했건만 아버지 백(伯) 사촌아우 종식과 함께 조부의 시신을 고향땅으로 운구하는 엄 청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월출산을 넘다가 조부를 부득히 월출산록 험지에 조부를 매장하고 가까 운 강진군 병영 지하리에 거처를 잡아놓고, 귀선은 다시 장흥군 유치면 내리 농암곡에 이 주하 여 삶의 터전을 일구기까지 역경을 이겨내면서 얼마나 간절하게 안정을 갈구했겠는가. 그래서 호를 춘강(春江)이라 했을 것이다. ‘봄의 강물’ 같은 생명의 근원이 되고 싶었을 절절 한 심경을 비문에 남겼을 터인데, 그 한 구절도 접하지 못하니 가슴이 무너진다. 비석을 옮기 기 어려웠으면 탁본 하나라도 떠 두었더라면 우리가 그 비문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를 새겨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한이 끝없이 이어진다. 다. 백척동 묘역 어렸을 때 나는 우리 시향제 묘역이 이곳 뿐인 줄 알았었다. 우리 동네에서 왕복 1시 간 반 거리였다. 논뚝길 따라 가다가 약간 높아졌다 낮아지는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는 곳이 었기 에 해마다 시제날을 기다렸다. 가을 시제날이면 날씨는 늘 더 할수 없이 청명했다고 나 는 기 억하고 있는데 도섭 전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음력 10월 보름이어서 엄청나게 추울 때도 있었 다고 한다. 가을 추수를 다 끝내고 새 볖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단장까지 다 마쳤거나 진행 중 더 추워지기 전에 시제를 올려야 되겠기에 양력으로 치면 11월이었겠다. 한마을에 사는 일가들이 모두 깨끗한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고 들판의 논두렁길과 산등 성이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걷는 일렬중대의 걸음걸이도 가벼웠다. 신나게 걷다보면 힘든줄도 모르 고 잔치집처럼 차일을 여러개 쳐 놓은 시향산에 도착했다. 가깝고 먼 곳에서 모여든 일 가 친 척들이 노유(老幼)없이 벌안을 그득하게 채웠다. 각 봉분마다 죽 늘어설 때면 나는 항렬 이 높 아 어른들 사이의 중간쯤에 서게 되는데 싫지 않았다. 붕분 따라 자리를 옮길 때면 소개 되는 조상님에 대한 설명은 귓전으로 흘리면서 비석이며 상석이며 동자석 등을 쓰다듬고 따 라 다 녔다. 오고가던 산길 들길이 좋았다. 시제를 마친 다음 갖가지 나물을 집어 넣어 비벼주 던 비 빔빕 맛이 좋았다. 그런데 그 비빔밥 맛보다 더 좋은 것은 어김없이 내 손에 쥐어주던 한 개의 유자였다. 유자를 받는 재미로 시제에 참석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역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