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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1915년 12월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가 운데, 맥아더는 전시 대령 계급으로 1917년 11월 당 시 42사단인 일명 무지개사단(Rainbow Division)에 소속되어 원정군으로 유럽에 파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맥아더를 알게 된 시기는 맥 아더가 소령 시절인 1915년 12월부터 1917년 11 월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당시 이승만은 호놀 룰루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운영하는 ‘한인기숙 학교(the Korean Compound School)’를 인수받아 ‘한인중앙학원(The Korean Central Institute)’으로 개칭하고 학교운영을 책임지고 있다가 1915년 6월 에 사퇴하여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 활 동을 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두 사람이 언제 처음으로 만났는지에 대해 맥아더 측의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승만이 맥아더를 알게 된 시기는 아마도 신문 지상을 통해 그의 이름을 들었 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했듯 이승만과 맥아더가 연 계되는 계기는 아무래도 필리핀의 정치인인 로 물로 (Carlos P. Romulo)를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 다. 프란체스카여사의 다음과 같은 회고가 있다. “독립운동하던 시절 워싱턴에서 ‘로물로’씨와 우 리는 바로 이웃에 살면서 가족처럼 가까이 지냈다. 당시 ‘로물로’씨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자기조국의 독립을 찾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 나라는 달 랐지만, 모든 면에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함께 투쟁 한 동지였다. 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을 만날 때 ‘로물 로’씨와 동행하기도 하고 연설을 하러 다닐 때도 ‘로 물로’씨, 임병직 씨 등 셋이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 다.”(『중앙일보』1983년 8월 13일) 맥아더는 미국에서도 아시아우선주의자로서 명 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이런 평가는 30여 년 동안 재임했던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력에서도 나타난 다. 1903년 소위로 임관하여 제3공병대대에 배속,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던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필리 1946년 이승만과 김구가 미군정 자문기관이던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민주의원 회의를 마친 후 창덕궁 앞에서 악수하고 있다(대한 민국역사박물관 제공). 해방정국의 한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승만(한국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