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page

50 2025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법론 재조명’ 호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안창호는 신민회의 국내에서의 구국운동 이 한계에 부딪히자,1910년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 재러한인사회의 민 족운동과 북만주 밀산(密山)의 봉밀산(蜂蜜山) 지역 에 독립운동 기지개척사업을 주도하고 미주로 건너 간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희와 홍사단 결성을 주도하 며 민족독립 가능성을 모색하던 중 3 · 1운동을 맞이 했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창호 는 선전 및 외교활동과 무장 및 의열투쟁, 재정확보 를 위한 식산(殖産)활동, 그리고 역사편찬과 교육, 언 론 · 출판운동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8년 초 결성된 신민회(新民會)는 구국운동 조 직인 동시에 당시 쇠퇴해 가던 대한제국의 낙후된 정치 ·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새 국가’, ‘신한국’, ‘유 신(維新)된 자유문명국’을 건설하려는 개혁운동 단 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민회의 취지는 블라디보스 토크에서 발행되는 『대동공보(大東共報)』의 「新韓國 (신한국)을 助成(조성)랴면 新民(신민)이 되어야  일」(1909년 3월 18 · 22 · 25일)이란 논설에 잘 집 약되 어 있다. 안창호는 이러한 이념의 신민회 창건을 주 도하였다. 이 논설의 내용은 이 무렵 이미 신민회가 공화제 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사실을 잘 보여준 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19년 3 · 1운동 이후 수립 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신민회 회원들이 핵심적 역 할을 했다. 따라서 신민회는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주목되는 사실은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을 계승하 여 1910년대 중국 남만주(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신흥강습소와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 비단, 국민단 등은 이미 공화주의 이념을 지향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기지개척과 무장독립운동을 추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화주의 이념을 수용한 대한 민국임시정부 수립의 흐름과 연계될 수 있었다. 1919년 10월 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경기도박물관 제공)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 기념사진(1919년, 국가 보훈부 제공). 앞줄 가운데 안창호, 왼쪽은 신익희, 뒷줄  왼쪽은 김철  안창호(1878~1938,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