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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한 대한제국 관료로 나아가는 등 친일화 경향이 두 드러지자 대구지회와 일진회의 합동설(合同說)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1910년 4월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일본공진회 관광단을 조직하였는데, 대구지회 총무 이일우를 비롯하여 회원 곽재헌 · 박기돈 등이 참여하 였다. 이것은 대한협회가 가진 한계이기도 했다. 대구지회 회원들은 애국계몽운동이 가진 타협적 인 경향에 안주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이라는 현실 인 식이 부족했다. 따라서 대구지회의 활동 과정에서도 타협적 성향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었다. 일제의 경 제적 침탈 과정에서 그 침략성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관료로 임명되거나 경제적 수탈기구에 참 여함으로써 일본 침략세력과 타협하고 있었다. ● 대한협회 대구지회,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한협회 대구지회 회원 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편입되어 갔다. 이미 1908년 7월 회장 박해령을 비롯한 주요 회원이 관 직에 임명되었지만, 경술국치 이후에는 군서기 · 면장 등 일제 식민통치기구의 하급 관료로 모두 16명 이 임명되었다. 일제 경제적 수탈기구인 금융기관의 설립 및 주주 로 참여한 경우는 24명으로 가장 많다. 이들은 대한 협회 대구지회 활동 이전부터 대구수형조합 · 대구농 공은행 · 대한농회 경북도지부·동양척식회사 등에 참 여하여 자산을 축적하였으며, 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대구은행 · 경일은행 · 경상합동은행 · 금융조합 등의 금 융기관에도 참여하였다. 일제 식민통치기구에 종속된 대구부협의회 · 경상 북도협의회 · 경상북도평의회 · 중추원 등 관변단체 에 참여한 대구지회 회원은 13명이었다. 이일우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구부참사로 활동하였으며, 서상돈의 아들 서병조가 1914년 대구부협의회에 참여한 이후 1918년 이종면·정해붕·이장우·이병학, 1919년 정재학, 1923년 서기하 등이 참여하였다. 경 상북도협의회에는 정재학·정해붕 등, 경상북도평의 회에는 정해붕 · 이장우 · 박찬동 · 조인석 등이 참여하 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장상철 · 정 재학·정해붕·이병학 등이 임명되었다. 「대구은행총회」보도 기사,『황성신문』(1906.6.19) 「대구농회」보도 기사 ,『황성신문』(1907.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