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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4년 2월 Special Theme  신간회 창립 97주년 특집 “한국독립운동과 신간회” 다. 한편, 이북지역은 농업문제 보다는 공업화에 대 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강릉지회는 강릉청년동맹, 영동기자단, 강릉철필 단 등 여러단체를 포섭하여 당시 강릉 최대 지주였 던 이근우에게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였다. 기본적인 회원 모집 및 회세 확장에 관한 기본 논의 외에도 빈 민구제음악회를 개최하여 모금된 금액을 지원하거 나, 수해가 닥칠 당시 구제회를 조직하여 지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주문진에서 형평사원을 모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강릉지회에서는 다른 단체들과 함 께 해당사건의 주모자로부터 사죄를 받아냈다. 전주지역의 경우 당시 현안 문제였던 군대 배치로 인한 국유지 가옥 철거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사립학교 폐지 반대, 산업통계조사 기관 설치, 누에 고치 및 면화 지정 판매 반대, 무보수 부역 반대, 농 민 여성운동 촉진 등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지역 내 일본어 발간 신문인 전북일보에서의 조선인 관련 멸 시 기사에 대해 다른 단체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정 정을 요구하였다는 점이 확인된다. 지역별 신간회 지회의 회의를 다룬 사진은 그리 많지 않으나, 다음 과 같이 안동지회는 회의 순서와 안건이 소개 되어 있어 주목을 요한다. 연합기관 설치 시도와 해소 1929년 12월 13일 계획된 민중대회가 사전에 발 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신간회 지회는 타격을 입었 다. 1930년 신간회가 온건화 현상을 띄자 신간회 경 성지회와 본부간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에 12월 30일 경성지회에서는 신간회 해소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이러한 해소론이 토의되기 시작 했다. 이러한 해소론은 강릉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1929년 1월 27일 원산총파업에 격려문을 보냈다 는 이유로 강릉지회 두 명이 체포되었고, 강릉경찰 서 고등계에서는 신간회회관을 압수수색하였다. 강 연 역시 무산되었다. 중앙 특파원 박문희는 강릉에 서 「신간회의 의의와 당면 임무」라는 제목으로 강의 를 하려고 했으나, 일제 경찰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신간회 안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 기념촬영(1928.1.29) 신간회 나주지회 발회식 기념촬영(1927.9.25, 성주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