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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3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를 위해 한·중·일 3국이 친선동맹을 맺어 선 린우의로써 독립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또 한 일본 천황에게 정의대도(正義大道)와 동양 평화를 실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회 신이 없자 선생은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 하며 항쟁하였다. 나철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 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 30일에 귀 국하였다. 1906년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 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외부대신 박제순(朴 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 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세칭 ‘5적 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 획했다. 이에 따라 김인식(金寅植) 등 동지들 의 자금지원을 받아 이대하(李大夏)로 하여 금 권총 8정을 구입하도록 했다. 또 이기·윤 주찬(尹柱瓚) 등은 자신회(自新 會)를 조직하여 취지서를 작성 하였고, 나철은 헌간장(軒奸狀) 과 동맹서(同盟書)를 작성하였 다. 또한 윤주찬 등에게는 우리 정부와 일본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 을 작성하게 하고, 김동필(金東 弼) · 박대하(朴大夏) · 이홍래(李鴻 來) 등으로 하여금 결사대를 조 직하도록 했다. 첫번째 거사일은 음력 정월 초하루(양력 2월 13일)로 정했다. 을사5적이 고종(광무황제) 에게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 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처단하려 했 다. 그러나 결사대원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후 음력 2월 5 · 8 · 12일 총 3회에 걸쳐 다시 5개조로 나누어 처단을 시 도했으나,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사 건으로 동지 서창보(徐彰輔)가 잡혀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거사 전말을 실토하면서, 동 지들이 차례로 붙잡혀 가게 되었다. 선생은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 하여, 1907년 7월 3일 유형 10년을 받아 전 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고종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오기 호 · 이기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1909년 단군 신앙인 대종교를 창시 선생은 1910년 8월 「한국병합에 관한 조 나철 선생(우측 끝) 등에 대한 평리원의 판결문(1907년 7월 3일, 국가기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