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page
2025년2월28일 금요일 5 (제218호) 관향조 종친회 [경을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도다. 건강은어떠한지궁금하오.듣건대경의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때가 한 달 중 에거반(居半,거의절반)이나된다는데이 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오. 나의동원에 벼가막익었음에몇말을타작하여보내노 라.비록 물량은 적으나 마음을 씀은 크니 경은어찌여길는지?마땅히대궐에들어 와 나를 보좌하여야 할 것인데븣. 간절히 바라노라 나머지는 격식을 갖추지 못하 오.] 명종 임금이 보낸 어찰내용이다. 이처 럼 청백한 삶으로 감사원에서 뽑은 조선 의 청백리 중 최고이기에 지난 15일(음1.1 8)오후6시전남장성군황룡면아곡리소 재 청백당에서 가진 밀성박씨 정혜공파 백비보존회 정기총회와 기제사에 참석한 종원들은 제상 뒤 어찰을 기록한 병풍을 보며 모범적 삶으로 선조현창에 앞장설 것을다짐한다. 이날 제향은 식지 않은 제물을 먼저 진 설하고 사당에서 신주출주 고사 후 청백 당 대청으로 신주를 모시고 홀기에 따라 제물을 진설하면서 제향이 시작되었다. 노강 박래호 선생의 집례로 시작된 이날 제향에는 유열(有烈,차종손),철용(鐵容, 부안), 래환(來煥, 전 회장)이 초헌,아헌, 종헌관으로 헌작하고 래섭(來燮, 전 교 장)의독축으로엄숙봉행되었다. 제향 전 가진 총회는 결산보고 및 경과 보고,감사보고,기타 토의 순으로 이어졌 다.근용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원근을 마 다하지 않고 찾아준 일가 여러분에게 감 사드린다고 말하고 항상 최선을 다하여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하였으며, 철용 원 로종친은 나이는 속일 수 없다며 언제가 될지 모르나 빠지지 않고 참례하고 또 아 들을 항시 대동하여 대물림 되도록 하고 싶다며적극적인참여를당부했다. 박래환,춘병 전 회장은 선조의 삶을 항 상 되새기고, 또 유훈을 명심하자며 종원 들에게품위를강조하였다. 정혜공은주세붕선생과막역한사이였 다.이날제향에집례를본노강박래호선 생은 지난해 영주 소수서원을 방문했을 때 이 같은 사실을 그의 후손에게 들었다 며 교류를 통해 정분을 이어가길 원한다 고 전하고 우리 후손들의 몸가짐이 곧 선 조 현창과 직결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량선생은승지공(承旨公)휘종원 (宗元)의 4남1녀 중 차남으로 자는 君遂 (군수)호는 莪谷(아곡)으로 38년간 한성 부판윤(제254·268·270·276대), 전라도관 찰사,호·형·예·공조 판서 등 주요 벼슬길 에집 한 칸이 없는 가난한 청백리로 시호 는貞惠公(정혜공)이다. 정혜는 청백수절(淸白守節) 曰 정(貞) 애민호여(愛民好與) 曰 혜(惠)란 의미로 시장은영의정이병모(1742~1806)선생이 지었다. 1554년 1월 19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별 세하자 부음을 들은 명종 임금은 아곡 선 생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이틀간이나 조 회를 멈추기까지 하였고, 예관(禮官)을 보내영전에조사(弔辭)를올리도록하였 다. 임금은 조사에서 안으로는 많은 학덕 을 지녔으면서도 밖으로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했으며 가정에는 한줌의 곡식도 없었으니 경의 죽음이 더욱 아깝고 애석 하다고하였다. 그리고임금은유사(有司)에게명을내 려 장례(葬禮)를 후(厚)하게 구원(救援) 하도록 하고 서해바다 돌을 골라 비(碑) 를하사하셨는데비문을세기다가청백리 인 선생에게 자칫 누를 끼칠까봐 비문이 없는 돌을 묘 앞에 세우게 해, 白碑(백비, 전라남도 기념물제198호)는 선생의 청백 리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가 있다. 명종임금은또박수량선생의청빈함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어머님이 살고 있 는 시골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은 날 이한달에절반이나되고,집은비가새고 있을정도로청빈하게살고있다.”는보고 를 듣고 99칸짜리 집을 지어 청백당(淸白 堂)이란 이름과 함께 하사하였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각되어 빈터만 남 게 되어,전남 장성군이 지난 2010년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322-1,홍길동테마 파크 내에 전통한옥 5채(사랑채,안채,별 당, 초당, 행랑채)를 건립 복원하여 선생 의 숭고한 정신을 배워 오늘에 일깨우고 자 함에 있어 ‘청백한옥’이라 하여 체험공 간으로활용한다. 청백리정혜공부조묘제향봉행 정혜공박수량선생의471주기기제사제향이지난15일봉행되어선조의음덕과유훈을되새기려는후손들이정성껏제향을봉행하 고제관이한자리에 모였다. 후손의모범적삶선조현창으로이어져 사당에서 출주고사 후 위패를 대청으로 모시고 있다. 무인(武人)으로서 위급할 때는 나라를 지키겠지만평화스러운때이니나아가녹 을 취하지 않겠다는 굳은 선비정신으로 후학을 가르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 란(丁卯胡亂)때에인조가강화도로피난 함에관부(官府)에가서국난에나아가기 를자청하여안주(安州)전투에서순절한 절사공(휘유)398주기추모제향이지난1 8일경남밀양시산외면금곡리소재부조 묘금계사(錦溪祠)에서엄숙봉행되었다. 기제사는 정홍 총무(유사)의 집례로 절 사공중중의수화회장이초헌관으로헌작 하고이어아헌만준고문,종헌영호현종 이 차례대로 헌작하고 집례를 본 정홍 총 무의독축으로30여분에걸쳐진행되었다. 절사공은 산외면 죽원(竹院)에서 태어 나 학문은 동향의 오한( 졀 漢) 손기양(孫 起陽)에게 배우고, 궁술은 양무공(襄武 公)김태허(金太虛)에게 배웠다. 정유재 란 때 일본 대마도에 잡혀가 오사카(大 阪)로 옮겼다가 1605년 사명대사의 쇄환 일행으로 환국하였고, 이후 무과 등제하 여봉사(奉事)가되었다.1627년정묘호란 때자진출전하여평안도안주(安州)에서 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영조 때 경상도관찰사가 사연을 조정에 알려 ‘절사(節士)’ 시호를 받았고, 형조좌 랑에 증직되었다. 산외 출신의 청천(靑 泉)신유한(申維翰븡1681~1752)이 내용을 상세히알려널리알려졌다. 선생의 삶은 청빈한 선비적 삶으로 더 욱 빛난다.1617년(광해군 9)에 무과에 급 제하였음에도 권귀(權貴)를 멀리하고 10 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들 이 혹 벼슬을 권하면 번번이 말하기를, “나는 무신이고, 시절은 이미 평온하다. 지조를굽히고권세가에게아첨하면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는 무인 (武人)으로서 위급할 때 는 나라를 지키 겠지만 평화스러운 때이니 나아가 녹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난 에 당하여, “국가에 난이 있으니 원컨대 군사 한 떼를 자원하여 이끌고 오랑캐를 대적하겠다.”하니 밀양부사 여우길(呂祐 吉)이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그 태도를 장하게여겨궁도와솜옷한벌을주었다. 한편 이날 제향전에 가진 총회에서는 2 027년선생사후400주년을맞아대대적인 현창사업과전국에산재한종원들이한자 리에 모일 수 있는 단합행사 추진계획을 세우고많은후손들의동참을당부했다. 절사공 박유 선생 부조묘 제향 봉행 선생사후400주년을2년앞두고대대적인현창사업추진예정 절사공부조묘 기제사가지난 18일밤영하의날씨에도아랑곳하지않고정성을다하여모신후기념촬영을하고있다. 박수화초헌관 박만준아헌관 박 영호종헌관 충주박씨강릉공종중(회장박우숙)은 대전광역시 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관 리되고 있는 강릉공 신도비 비문이 한문 으로 되어있어 한문에 박식한 사람이 아 니면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워 누구나 쉽게 읽고 뜻을 알 수 있도록 한글로 해석하여 액자 13개를 제작한 후 강릉공 후손들의 소문중 재실에 헌정,종원 뿐만 아니라 누 구나 강릉공 선조의 청빈함과 높은 도덕 적삶을알수있도록할계획이다. 지난해말전문가에게의뢰한탁본으로 한자를 복원하는 등 해석을 마쳐 현재 제 작중으로돌아오는한식일을맞아보급하 게 된다. 강릉공의신도비는조선전기대학자이 자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서거정 선생이 지은것으로비석의크기는높이164㎝,폭 64㎝,두께35㎝이다. 서거정 선생은 경연(經筵)의 강론(講 論)을 45년 동안 하였고,문형(文衡)을 맡 은햇수가23년이었다. 과거를 주관하여 인재를 선발한 것이 2 3회나 되었다. 성균관 재학 시기 항상 선 두를 차지하였으므로,유생들이 “양촌 권 근의문장이외손자에게전수되었을것이 다.”라며부러워하였다.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시 (詩)에 능하였다. 그의 문장은 중국에까 지 알려져 1460년(세조 6) 사은사로 서중 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安南) 사 신과 시재를 겨루었고, 요동인 구제는 그 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하며, 1476 년(성종 7) 원접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을 때에는 수창(酬唱)을 잘하여 기재라는칭송을받았다. 서거정의 어머니가 안동권씨로 문충공 권근의 따님이다. 그리고 강릉공의 부인 은권근의손녀딸로두분의관계는처내 종형제간이기에강릉공에대해서거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비문에 사실관계 가정확하여그전문을함께실어본다. 명문(名門) 충주박씨(忠州朴氏)는 신 라(新羅)에서 비롯하여 고려조(高麗朝) 에크게나타나위인장덕(偉人長德)이대 를 이어 성하여 동국(東國)의 대성(大姓) 이 되었다. 부정공 휘 영(副正公諱英)으 로부터 오대(五代)에 와서 지성(之誠)에 이르러 벼슬이 숭록대부 민부상서(崇祿 大夫民部尙書)이니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이가세량(世梁)을낳으니광정대부지 도첨의사사(匡靖大夫知都僉議司事)요, 이가광리(光理)를낳으니중산대부민부 의랑(中散大夫民部議郞)으로 세 차례 개 성소윤(開城少尹)이 되었는데 옳고 그름 을 판결함이 물 흐르듯 하여 권귀(權貴) 를피하지않았다. 합천이씨( 川李氏) 전리정랑(典理正 郞) 춘계(春啓)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 들을 낳았는데 둘째 휘 진( 풂 )이 바로 공 의 아버지이다. 성균 진사(成均進士)가 되었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진해, 직산(鎭海稷山)의 감무(監務)를 지냈다. 부인은 보안임씨(保安林氏) 전서(典書) 건(騫)의딸이다. 四男을 낳으니 맏이가 효함(孝誠)이니 곧 공이요 다음은 충함(忠誠)이니 호조참 판(戶曹 핫 判)이요 셋째는 제함(悌誠)이 니 제주판관(濟州判官)이요 넷째는 신함 (信誠)이니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이다. 공은나면서부터남보다뛰어나고신기 영상(神氣英爽)하여 독서(讀書)할 줄 알 고부터는 자기의 이름 뜻을 돌이켜 생각 하여 나아가고 물러섬을 오직 부모의 명 에 따랐고 아우들과 우애하니 주변에서 모두 그의 효제(孝悌)에 감복(感服)하였 다. 성품이 또 청렴강직(淸廉剛直)하고 정 치수완도있어처음명성(名聲)으로우림 (羽林:近衛兵)에 발탁되어 해풍(海豊)에 출수(出守)할때백성다스림을한결같이 옛사람으로법을삼아추호(秋毫)라도녹 봉(祿俸)이 아니면 취하지 않으니 청백 (淸白)한명성이경내(境內)에넘쳤다. 세종 경술(世宗庚戌)년 가을 보령(保 寧)에 해구(海寇)가 침입하여 걱정거리 였으나 이를 토벌할 적임자가 없었는데 공이청백(淸白)함으로선발되어부임즉 시 순찰사 최윤덕(巡察使崔潤德), 감사 박안신(監司朴安信)과 더불어 함께 성 (城)동쪽일리(一里)지점당산(唐山)남 쪽을 살펴 면밀한 계획으로 몇 달 되지 않 아 축성(築城)을 마치니 백성이 별로 힘 들이지않고도적이자취를감췄다. 이듬해 통정(通政)에 올라 청주목사 (淸州牧使)가 되었는데 치적(治蹟)이 많 아 공과(功課)가 으뜸 되었으며 청백(淸 白)에기록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들어와 첨추(僉樞)가 되었고 또 얼마 후 나아가서 강릉대도호 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니 강릉은 관 동(關東)의 큰 도시로 창고가 가득 차고 집들이 즐비(櫛比)한데 주민이 실화(失 火)하여 불길이 매섭고 바람도 억세어 부 중(府中)이연소(延燒)되었다. 공이 머리를 치면서 불을 향하여 하늘 을 우러러 크게 탄식해 말하기를, 뷺내가 덕정(德政)을이루지못하여이런재난이 일어나니 백성은 무슨 죄인고?옛날 강릉 은 바람이 역(逆)으로 불어 불길을 잡았 는데 지금의 강릉은 바람이 불을 재촉하 니 내가 유곤(劉昆)에게 부끄럽지 않은 가?뷻하고 말을 마치자 바람이 그치고 불 이 꺼져 다시 강릉의 고사(古事) 하나가 되었으니 그 또한 기이(奇異)한 일이다. 공이 청백한 정치로 네 고을을 역임하면 서 모두 양초(梁楚)의 명예를 얻었는데 강릉에서더욱높았으니사람들의마음속 에 인애(仁愛)가 깊이 심어져서 하늘을 감동케한것이었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안팎 옷감 한 벌을 하사하시고 더욱 권장하여 재상(宰 相)의 인물로 기대되었으나 세상과 어긋 남이 되어 충분히 등용치 못하였으니 옛 사람이이른바하늘에게는능히하면서도 사람에게불능하다는것이아니겠는가? 공이 홍무 정묘(洪武丁卯)에 출생하여 경태 갑술(景泰甲戌) 정월 임진일(壬申 日)에 관아(官衙)에서 졸(卒)하니 향년 (享年)이六十八이었다. 청백( 휠 白)으로 이조참판(吏曹 핫 判) 에 증직되고 예장(禮葬)을 특사(特賜)하 시니 회덕현(懷德縣) 북쪽 정당촌(政堂 村) 후록(後麓) 화산(花山)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하여 숙부인 권씨(淑夫人權 氏)와합폄하였다. 부인은 안동대성(安東大姓)이니 양촌 선생 문충공 휘 근(陽村先生文忠公諱近) 의 손녀(孫女)요, 동지 총제 천(同知摠制 踐)의 딸인데 거정(居正)에게 내자가 된 다. 공보다 팔 년(八年) 먼저 세상을 뜨니 그 숙신자혜(淑愼慈惠)한 덕(德)이 참으 로 군자(君子)의 좋은 배필이었다. 두 아 들을 두니 원직(原直)은 현감(縣監)이고, 원창(原昌)은 판관(判官)인데 함께 계유 (癸酉)년진사(進士)에합격하였다. 현감이 정랑 민화(正郞閔和)의 딸에게 장가들어 四男을 낳으니 도( 떳 )는 안주목 사(安州牧使)요, 인( 쵸 )은 부사직(副司 直)이요, 규(圭)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 察)이요, 지(址)는 장사랑(將仕郞)이다. 뱚판관이군수이백림(郡守李伯林)의 딸 에게장가들어三男一女를낳으니훈(壎) 은 사직(司直)이요, 서(墅)는 참봉( 핫 奉) 이요, 숙(塾)은 장사랑(將仕郞)이요, 딸 은 생원복팽손(生員卜彭孫)에게 시집갔 다. 나머지는다쓰지않는다. 내가그윽히생각건대세상의덕(德)을 숭상하는이들이, 사람의 한 가지 선(善)과 한 가지 예 (藝)로능히일방(一方)에행하여밝게나 타나면 모두 백성을 교화하는 음성과 태 도라고일컬으니청백( 휠 白)도 또한 마찬 가지이다. 이를쉽게말할수있겠는가?그러나훼 방과 칭찬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이 알아 주지 않아도 태연하게 인의(仁義)에 생 (生)을 마치려 하다가 나아가서 백성을 다스리게되어서는덕정(德政)이하늘을 감동시켜 화재가 그치고 충의(忠義)가 간성(干城)이 되어 도적이 물러가 왕이 감탄하고 백성이 부모(父母)라 한 것이 어찌 인의(仁義)가 축적(蓄積)되어 행정 (行政)에 펴진 것이 아니겠는가! 간절한 근본을 알 수 있어 청백(淸白)은 하나의 여사(餘事:남는 힘으로 하는 일)인 것 이다. 공의 두 아들이 내가 친척의 친분이 있 어 공의 사행(事行)을 나만큼 아는 이가 없다 하여 비문(碑文)청(請)하기를자주 하니 또한 가상(嘉尙)하도다. 사양치 못 하고위하여명(銘)하기를, 오직 충주박씨(忠州朴氏)는, 고려에서 비롯하여 여러 공경(公卿) 고관(高官)들 이 공(功)이 있고 덕(德)이 있네. 대대로 인물이어,광정(匡靖)과숭록(崇祿)이요. 조선(朝鮮)에 들어서도,명석(名碩)이 많 았도다.오직 공이 이어받아,나면서 특이 했네. 양촌(陽村)에게 친히 배워, 아들에 게 영향 줬네. 주군(州郡)을 역임하여, 치 성(治聲)이높았으니.높은저치성(治聲) 이야,오직 청렴결백일세.어찌 청백 뿐이 더뇨, 인자무적(仁者無敵) 아니던가. 보 령(保寧)에 재임할 제, 도적이 물러갔고. 뒤에 강릉(江陵) 맡아서는, 불도 절로 꺼 졌으니. 덕정(德政)이 없었던들, 여기까 지 이를손가. 한(漢)나라 어진 관리(官 吏), 고금(古今)이 동철(同轍)이라. 세상 과 어긋져서 관직에서 운명하니, 임금의 별난 은혜, 융숭한 것이었네. 증직(贈職) 을 내려주니, 이조(吏曹)의 직품이요. 예 장(禮葬)을 하사하니,화산(花山)의 기슭 일세. 한 언덕의 비궁( 섟 宮)은, 만세(萬 世)의 유택(幽宅)일세. 효자(孝子)가 잘 이어서, 유적(遺蹟) 나타내려 하니. 내 명 (銘)이 거짓 없어, 큰 비(碑)에 전각(篆 刻)한다. -의정부좌찬성 달성군 서거정 강중 찬 (撰). 충주박씨강릉공(휘효함)신도비문한글보 급나서 강릉공묘소,예장된묘소로 대청댐둘레길이 묘역앞으로 지나감에따라많은길손들의머무르고있다. 탁본하여한자복원후번역,대형액자각소문중재실게액(揭額) 강릉공신도비 강릉공청간재휘효함신도비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