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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31일 일요일 5 (제204호) 관향조 종친회 춘천박씨대종회(회장: 21세손 박상광) 는 춘천박씨紀元 797년(2023년) 11월13일 (음10월1일) 오전 11시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 산2번지 중시조(文 懿公 朴恒) 묘역에서 종친회 임원과 전국 종원들이 모여 추향시제를 봉행하였고 오 후에는 경운산 청평골에 소재하는 2世(판 사공朴元庇)묘에서시제를봉행하였다. 그리고춘천박씨선기공종친회(회장:22 세손 박경환)는 11월15일(음 10월3일) 춘 천시 퇴계동 우미산 선산에 있는 사당 숭 경사(崇敬祠)에서 종친회원 백여명이 참 석한가운데추향시제봉행후경환회장은 1958년생인 현욱, 민걸,민욱 종친에게 장 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부부 은수저세트를 경로기념품으로전달하였다. 경로기념품은 65세 이상 종원에게 수여 하는것으로올해까지56명에게수여했다. 후손 육영사업으로 서울대학교에서 물리 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박민석을 비롯하여 대학교에 재학 중인 박민중, 박선형, 박주 언 종원에게 장학금1백 만원씩 전달하였 으며 현재까지 장학금 수혜자는 104명이 다. 시제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문중발전 에 기여한 종원에게는 1백만원의 격려금 을 지급하는데 올해까지 69명에게 지급되 었다. 올해 아들을 출산한 박제인 종원에게는 출산장려금 3백만원을 지급하였고, 종친 회활성화와문중발전에 크게기여한종원 에게는 븮자랑스런 춘천인상븯을 제정하여 수여하는데 올해는 23세손 박영천 감사가 수상하였다. 춘천박씨는강원도토호성씨50여중수 부도시춘천을관향으로하는유일한씨족 으로자랑스러운문중으로발전하고있다. 특히전국주요유적지와집성촌을탐방 하며 여타 문중과 소통하며 함께 발전을 이루고있어지역의많은문중에서벤치마 킹을 하고 있다. 지난 경주의 추향제례에 종원 40여명이 참례하고 영양, 영해 등 춘 천박씨집성촌을탐방하였고,본보단체구 독으로 종원들의 보학증진에 앞장서고 있 다. /춘천박씨명예기자22세손박민군 춘천박씨2023년추향시제봉행 선기공종중장학금,경로기념품,출산장려금,모범종인,자랑스런춘천인상등종원복 지에최우선 춘천박씨2023년추향시제봉행 춘천박씨선기공종중의숭경사시향이지난달13일봉행된가운데전체종원가구수에70%이상이참여하고있어지역에서도유명하다 . 세조(재위 1455∼1468)가 단종을 폐위 할 때 뜻을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켜 죽어 간 사육신을 비롯한 충신의 혼을 모신 숙 모전과신라만고충신관설당박제상,유차 달공을 배향한 공계사. 고려충신 포은·야 은·목은 등을 모신 삼은각의 추향제례가 지난6일있었다. 이날 제향은 숙모전 보존회(이사장 정 백교) 주관으로 단종대왕과 정순왕후의 위패가 봉안 된 숙모전과 동·서무에 배향 된 충신의 혼을 추모하는 제향이 오전 11 시 맹교성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이동국 숙모전 이사, 서승원 소수서원 운영위원, 이원병 전주이씨 한남군파 종회장이 제관 으로각각헌작하고강원식축관의독축으 로 1시간여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동무에 는신영순평산신씨미래교육분과위원장, 서무에는 성갑용 창녕성씨 신재공파 도유 사가각각헌작했다. 관설당공과 유차달공이 배향된 동계사 에서는 영해박씨 순진(順鎭), 순길(淳吉) 현종이 초헌관 아헌관으로 헌작하고 문화 유씨대종회 유종현(柳淙鉉) 고문이 종헌 관으로헌작했다. 포은선생등이배향된삼은각에서는영 해박씨 대종회 성수(城秀)대종회장이 초 헌관으로 헌작하고 이교찬, 유승현 씨가 이어아헌과종헌으로헌작하는등40여분 에걸쳐진행되었다. 숙모전은 충청남도 공주 국립공원 계룡 한 기슭에 위치한다.세조(재위 1455∼146 8)가 단종을 폐위할 때 뜻을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켜 죽어간 사육신 이하 여러 충 신들의혼을모셨던곳이다.세조가왕위를 차지하는과정에서황보인,김종서는수양 대군에게살해당하였고,왕위를찬탈한다 음해인 세조 2년(1456)에는 박팽년을 비 롯한사육신이단종의복위를꾀하다가모 두 참형당했다. 같은 해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 이 이곳 계룡산에 와서 제 단을 마련하고 이들을 위 해 초혼제를 지내어 영혼 들을 위로하였다고 전해 진다. 그 후 세조 4년(145 8) 조정에서는 단종을 비 롯하여안평대군,황보인, 김종서 등 당시 죽음을 당한 280여 위패를 모시고영혼을위로하기위한초혼각을세 웠다고 한다.세조 12년(1466)에 김시습 등 이 건물을 더 짓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영 조 4년(1728) 화재로 타버린 것을 고종 원 년(1863)에 만화스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04년 숙모전이라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 내에는 삼은각(三隱閣), 숙모전(肅慕殿) 과 동·서무(東·西 밴 ), 동계사(東 김 祠)가 있다.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삼국 조의 충신을 모셨기에 우리나라 사우(祠 宇)중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많은 위패는 민족사적큰의미를담고있으며살신성인 의 충의정신을 수호하는 전당으로 이곳에 모신 349위(位)의 충혼(忠魂) 의백(義魄) 은한민족의애국이념을면면히이어온상 징적존재이다. 숙모전 동·서무에는 순천박씨 한석당 박중림 선생을 비롯하여 아들 팽년, 인년, 영년, 기년, 대년 등 5형제와 손자 헌, 순, 분,분의 아들 점동,개동,파록대,흔산,금 년생 등 오형제와 박쟁, 박숭문, 박측동, 박흥생, 박이영, 박하, 박계우, 박수량, 박 양함,박윤,박수명 등 26위의 위패가 봉안 되었다. 이에 밀양박씨 난계공파, 국당공파, 순 천박씨충정공파후손들은아침일찍찾아 와 선조의 혼을 달랬으며. 관설당 공의 후 예 60여명은 멀리 진도와 강진, 함안 등에 서새벽부터길을 재촉하는 등안동,봉화, 영주,서천,예산,포항,영해,서울,인천등 에서찾은후손들과조우하여일가간의정 을 나누기도 했다. 관설당공이배향된동계사는숙모전·삼 은각 동편에 있으며 936년(고려태조19)에 개국공신 유차달이 관설당공의 만고충절 을이곳에초혼제사하고왕명으로동계사 를 건립하였다. 화재로 재건되고 또한 철 향(撤享) 되었다가 1956년 사림의 헌성으 로중건되고유차달을추배하여지금에이 르고있다. 충신의혼을모신‘숙모전·동계사’추향 봉행 뱚뱚뱚뱚뱚뱚관설당박제상선생과단종절신동무(東 밴 )안평대군을비롯한48위와 뱚뱚뱚뱚뱚뱚합독에122位,서무(西밴 )문민공박중림을비롯한48위와합독에123위를배향 숙모전·삼은각·동계사추향이지난6일봉행된가운데관설당후손들이대거참석기념촬영을하고있다.이 밖에도순천박씨,밀양박씨복야공후손들도함께했다. 국당공(휘흥생)과한림공(휘계우)의후손인밀양박 씨난계·국당공후손이참례후기념촬영을하고있 다. 순천박씨충정공파성규회장과임원진이참석선조 의충혼을기렸다. 관설당공의후손으로삼은각에초헌관으로헌작한 박성수회장(中) 동계사초헌관순진(右), 아헌관순 길(左)현종이제례후기념촬영을하고있다. 영흥부사로 나갔다가 1518년 10월 13일 관아에서 순직하시어 영흥에서 한양까지 운구하는 데 5개월이 걸려 이듬해(1519년 : 중종 14) 3월 경기도 고양시두응촌선영에안장되었던해 백공(휘 소영, 召榮)의 세일사와 한 글묘비개수식이지난달13일오전1 1시두응촌제2묘역에소재한현지에 서있었다. 이날 행사는 규정공 후 소파 임원 진과 후손 등 100여명이 함께한 가운 데내빈소개,제막,감사패전달,회장 인사,내빈축사,기념촬영,고유제 순 으로진행됐다. 성율 해백공파중앙종친회장은 인 사말을 통해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이 조상이 없는 후손이 어디 있겠습 니까마는 급변하는 현대 물질문명 속에 숭조와 위선 정신은 날이 갈수 록 퇴색해 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며 또한 현대를 사는 후손들 대부분이 한문을 배우지 않 아서 소중한 비문을 독해하지 못하 는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렀기에 부 득이 한글 와비를 세우게 되었다며 한글 묘비를 세우게 된 배경을 설명 하고 이번 사업에 재원을 분담해 후 원해 주신 회직자를 비롯한 종원 여 러분들의 헌신적 협조에 감사의 말 씀을 전하며 특히 본 사업을 할 수 있 도록 인허해 주신 대종회장님께 이 자리를빌어감사의말씀을드린다고 말했다. 해백공 묘역은1519년 3월 안장 후 1520년조광조등의사림파유학자들 이 주장한, 유교의 사상과 이념을 국 가의모든분야에서실현시켜태평성 대를 이룩한다는 지치주의에 입각한 도학정치의 실현에 힘쓰다 기묘사회 로파직된뒤에는후진양성에힘썼던 모재김안국선생이지은묘비문으로 묘비를 세우고 상석과 문인석, 무인 석등의석물을갖추었다. 이후 400여년 간 도사공파 파주월 롱 문중에서 수호하며 누차 사초를 해오다 1969年 제2차 수비(세로 碑) 및상석교체와사초를하였으며,200 2年 묘역 정비(祭節 확장)및 사초에 이어 이번 세 번째 한글묘비는 기존 묘비를오른쪽에그대로두고명성석 재(대표 박영정)의 높은 기술력으로 묘비를왼쪽에세우게되었다. 이에박성율회장은명성석재박영 정대표에게감사패를전달하고치하 하였으며,참석한모두에게는후손만 대에이르기까지영구히수호하고보 존해서 종강삼시 구현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말했다. 해백공박소영선생의본관은밀양 (密陽)字는길보(吉甫)이다. 덕성과 문예가 조숙해서 16살(148 0년)에군수를지낸오한(吳漢)의따 님해주오씨를배필로맞이했고19살 (1483년)에 소과(小科)에 급제해 생 원(生員)이 되고 21살(1485년 : 성종 16)에별시(別試)문과(文科)에급제 하여 위로 형 셋(의영,광영,증영)과 함께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해 가 문의명성을크게드높였다. 정9품 승문원 정자(正字)로 벼슬 을 시작한 후 정7품 홍문관 박사(博 士)를거쳐종6품종부시(宗簿寺)주 부(主簿)가 되었으며 27살(1491년 : 성종 22)에 아버지 존성재공이 향년 59세로 돌아가시고 이듬해 어려서부 터 한 이불을 덮고 자며 쌍둥이처럼 자라각별했던한살 위셋째 형교리 공(校理公) 증영(增榮)이 29살로 세 상을떠나자식음을전폐하며슬퍼했 지만형이남긴조카문도공(文度公) 훈(薰)과 주부공(主簿公) 혜(蕙)을 살뜰히보살피며가문의융성을꾀하 는데진력하였다. 33살(1497년 : 연산군 3)엔 정5품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차했고 35 살(1499년)에 예조정랑을 거쳐 37살 (1501년)에 종4품 홍문관 부응교(副 應敎)로 승차했고, 39살(1503년)인 1 1월 22일에 정4품 사헌부의 장령(掌 令)으로 승차, 12월 11일엔 종3품 집 의(執義)로 승진했으며 40살(1504년 :연산군 10)에 홍문관의 전한(典翰) 을 거쳐 3월 9일에 정3품 직제학(直 提學)으로 승진되면서 상대지제교 (常帶知製敎)와 경연(經筵), 춘추관 (春秋館) 직을 겸임했으나 7일 뒤인 3월 16일 홍문관의 대간(大諫)으로 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했던 이세좌가 왕이 내린 술을엎질렀으나불경죄를논하지않 았다고 둘째 형 광영(光榮)에 이어 의금부에 갇혔다가 16일 뒤인 4월 2 일에태형(笞刑)60대를맞고충청도 진천으로귀양을갔는데그해10월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관련되었다는 혐 의를 받았지만 이미 귀양을 가 있어 화를면할수있었다. 귀양살이 2년 만인 42살(1506년 : 연산군 12)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와 정3품 장악원(掌樂院)의 정(正) 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가 승문원의 판교(判校)를 거쳐 43살(1507년 : 중 종 2)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어 당상관(堂上官)으로승진다. 이듬해(1508년) 병조참의(兵曹參 議)를거쳐45살(1509년)에형조참의 (刑曹參議)를 지낸 뒤 47살(1511년 : 중종 6)에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 지(同副承旨)가 되었고 49살(1513 년)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역 임하고 51살(1515년 : 중종 10)에 종2 품직인황해도(黃海道)관찰사(觀察 使)로 나가서 2년 임기를 마치고 53 살(1517년)에 정3품 내직인 호조참 의(戶曹參議)로 조정에 들어왔다가 1년뒤(1518년:중종13)에병이들어 요양차외직으로나가길자청해함경 도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부임했는 데 낫질 못하고 그해 10월 12일에 그 곳관아에서돌아가시니향년54세였 다. 한편 이날 봉행된 세일사는 창훈 (昌勳,前천안향교 전교)고 문의 집례로 부여 은산문중 의 일규(一圭),관리이사 문 구(文九, 영양 석보문중), 전례이사 봉갑(奉甲, 나주 촌곡문중) 현종이 각각 초 헌관, 아헌관, 종헌관으로 헌작하고 대의원 은순(銀 淳, 청양 운곡문중장) 현종 이 대축을, 문화이사 성순 (星淳, 순천 승주문중), 대 의원 기덕(耆德, 구미 문중 장) 현종이 각각 좌우집사 를맡았다./박현배명예기자(서 울특별시본부) 밀양박씨해백공세일사봉행및한글묘비개 수 밀양박씨해백공파세일사및한글묘비제막식이지난달13일두응촌제2묘역에서규정공후각지파임원진과후손등이참예한가운데있 었다.이 번한글묘비는어려운한자묘비가일반대중에게는읽기가어려운단점을보완했다. 순한문비문후손들이읽고이해하지못해필요한곳만한문병기(倂記) 한글묘비제막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