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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이승만의 귀국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49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당시  태평양미육군사령관은 맥아더였는 데, 그는 연합국최고사령부 총사령 관과 기타 주요 직위를 겸하고 있었 다. 이 시기 이승만은 맥아더의 도움 으로 해외유력 망명인사들 가운데 최 초로 귀국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귀 국 도중에 1945년 10월 13일부터 3 일 동안 일본 도쿄에 체류하며 맥아 더 및 하지 중장과 만나 한국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맥아더와의 연계를  통한 이승만의 조기 귀국은 정치적으 로 이승만의 남한 정계 부각에 결정 적 단서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의 국회개원 일에 이승만은 최고 연령자로 임시의 장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7월 20일 개회한 국회에서 그 는 출석의원 196인 가운데 180표의  압도적 다수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 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 이승만과 부 통령 이시영은 1948년 7월 24일 정· 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대한민 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맥아더의 역할 은 이승만의 배후에서 후광을 드러냈 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맥아더와 이승만의 초기 관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있어 중요한 인물을 선정한다면 아마도 이승만 과 맥아더(Douglas MacArthur), 그리고 하지(John R. Hodge)를 거론 할 수 있을 것이다. 3인은 정부수립 이전 한국의 정치질서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승만과 하지 두 사람에 대해 공히 후견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은 바로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하지의 직속상관으로서 그가 주한 미군사령관의 직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격려하고 권한을 인정했 었다. 한편 이승만에게 맥아더는 미국의 후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맥아더와 이승만은 정부수립 시기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매우 긴밀 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언제 맥아더는 이승만 을 처음 만났을까? 아직까지 맥아더가 이승만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 밝혀주는 자료 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오래전 이승만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Francesca Donner Rhee)가 그의 비망록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에 대 해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평소에 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을 그의 소령시절부터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맥아더’장군의 장인이 ‘한국우호연맹 (한국친우회, League of Friends of Korea)’의 고참멤버로 대통령의 독 립운동 시절 때부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중앙일보』1983년 6월 24일).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한국친우회(League of Friends of Korea)’는 이승만이 주도가 된 구미위원부에서 1919년 5월 경에 설립한 단체로 3·1운동과 일본 식민통치의 실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까지 확대 조직하려 한 단체였다. 먼저 이승만이 맥아더를 소령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맥아더는 1880년생으로 그가 소령으로 진급한 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