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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부의 성립과 항일독립운동 49 였다. 1933년 2월에는 국민부 대원 강춘삼(康春三)이 군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평안북도 위원군 밀산면에 잠 입했다가 체포되었다. 3월에도 평북 벽동군 송서면 이서동에서 군자금 모집활동하던 국민부 대원 수십 명이 이들을 추적하던 벽동경찰서 수색대와 관전현 하루하에서 교전했으며, 국민부원 1명이 전사하였 다. 7월에는 국민부 의연대장 김벽산(金碧山)이 집안 현 마제구(馬蹄溝) 사포전자(沙包甸子)에서 군자금과 동지 획득 작업을 전개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1934년 8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중대장 조화선의 부대원 8 · 9명이 관전현 내 여러 지역에서 한인 농민 들을 대상으로 중국돈 대양(大洋) 30원의 의무금을 징수했으며, 만 15세에서 35세 이하의 청소년을 군 인으로 가입시키고자 했다. 1936년 10월 9일에는 조선혁명군 정운준(鄭雲俊) 외 5명의 대원이 국내로 파견되어 벽동군 오북면에 있는 벽동경찰서 소속의 노장(魯章)파출소를 습격하였다. 부상당한 광산노동 자가 시약(施藥)을 구하러 온 것으로 위장한 이들은 출장소 내에 있던 순사 등 4명을 사살하고 기병용(騎 兵用) 소총 1정을 노획하였다. 국민부에서는 국내의 깊숙한 지역까지 대원을 파 견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국내와의 연결망을 확보하 고자 시도하였다. 1932년 3월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대원 이선룡(李先龍)을 국내로 파견했다. 그는 권총 을 휴대하고 장호원에 있는 동일은행(東一銀行)을 습 격해 약 13,000원의 군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해 일 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선룡은 충청과 경기 · 강원 일대로 광범위하게 펼쳐진 일제의 경계망 을 뚫지 못하고 1개월 동안 숨어지내던 중 원주 문막 리에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국내언 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만주사변 이후도 독립군의 활 동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었다. 1932년 6월에는 변낙규(邊洛奎)를 대장으로 김광 해(金光海) · 김궁민(金弓民) 등의 조선혁명군 대원들 이 국내로 파견되어 군자금의 모집과 국내 정세의 파 악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32년 6월 과 9월 국내로 진입하였는데 처음에는 광산부호 최 창학(崔昌學)을 볼모로 거액의 군자금을 획득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부재 중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한 체, 일단 만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때 대원들은 삭주 군 외남면에 사는 김윤근(金允根)과 영변군 고성면에 사는 김두운(金斗運) 등 수명의 동지를 규합하는 데 에는 성공하였으며, 삭주군에서 이윤근(李允根) 등 6 인으로부터 현금 150원의 군자금을 획득하였다. 이후 대원들은 1933년 2월 다시 국내로 들어와 우 선 덕천군 덕안읍 왕택준(王澤埻)의 집에서 권총 1발 을 발사하고 군자금으로 현금 110원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덕천경찰서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단원 장인준과 김일봉이 체포되면서 대대 적인 검거가 이루졌으며, 체포 당시 김일봉은 다이 나마이트를 깨물어 폭사하였다. 이후 변락규와 동지 들은 1933년 4월 태원경찰서원에 의해 체포되었으 며, 검거된 인물 중에는 변낙규의 처 김광월(金光月) 과 장남 변형섭(邊亨燮)도 포함되어 있었다. 변낙규 는 1933년 8월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10년 형에 처 해졌다. 1933년 2월에는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장 고이허 (高而虛, 본명 최용성)와 조선혁명군 부사령 양세봉 의 명령을 받은 서원준(徐元俊)이 국내로 파견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