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page

Special Theme • 근대 대구의 애국계몽운동과 그 한계 49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의 지배가 점차 노 골화되면서 자산가인 지주 및 상인층은 직접적인 위 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의 지원하에 추진되 었던 광무개혁 과정에서 늘어난 국채 1,300만원과 그에 대해 난무하는 풍설 때문이었다. 일본은 국채 1,300만 원의 담보로 조선정부가 가진 전국의 수조 권을 차지한다는 풍설도 그중의 하나였다. 특히 수조권을 장악한 징세장 · 시찰관 · 검세관 등 을 거치면서 내장원의 세금 대납을 통해 재산을 축 적하였던 서상돈과 그의 영향력으로 각처로 파견되 어 수조권을 행사했던 징세장 김병순, 시찰관 최영 달과 서긍순, 그리고 의흥도사음(義興都舍音) 서봉기 등이 가지고 있던 국채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은 매 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 대한협회 대구지회, 일본 침략 세력과 타협하다 대구지회 회원으로서 부호 및 전·현직 관료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 과정에서 설립된 수탈기구에 참 여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은 애국계 몽운동이 가진 타협적인 경향에 안주하여 외세의 침 략이라는 현실 인식이 부족했다. 1906년 6월 설립된 대구농공은행에는 은행장 이 석진을 비롯한 김병순·서병오 · 정규옥 · 서상돈 · 이장 우 · 최만달 · 이병학 등이 주주로 참여하였으며, 1906 년 8월 설립된 대구수형조합에는 조합장 이석진, 조 합부장 최만달, 평의원 이병학 · 이경천 · 정해붕 · 문봉 준 등이 참여하였고, 1908년 8월 설립된 동양척식 회사에는 설립위원으로 이병학·정해붕 등이 참여하 였다. 그리고 1907년 10월 설립된 대한농회 경북도 지부에는 지부장 박해령, 부장 서봉기, 평의장 서상 돈 등이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더욱이 대구지회가 설립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08년 7월 회장 박해령을 비롯한 주요 회원이 관 직에 임명되었다. 즉 회장 박해령은 칠곡군수, 평의 원 김영주는 장기군수, 찬의장 정재학은 개령군수, 평의장 서병오는 신령군수에 임명되었다. 그 외 이 경선이 예안군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대구지회의 주요 회원들이 일제가 장악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에 세워진 국채보상운동기념비(출처 한국 향토문화전자대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김광제 (1866 ~1920,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