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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경남지역 후기 의병 봉기와 일본군의 의병 탄압 49 14~15명을 거느리고 산청과 하동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박동의 의병대가 일본군 수비대 와의 벌인 주요 교전 기록 중 하나 는 1908년 9월 13일 방장봉(方丈 峯) 부근 전투이다. 이 때 일본군 함 양수비대와 산청분견대는 합동으 로 벌인 작전에서 병력 미상의 박동 의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3명의 의 병을 죽이고 의병 1명을 포로로 체 포했다고 한다. 이 전투와 관련하 여 1909년 12월 마산주재소의 일 본 경찰에게 체포된 서병희(徐炳熙) 가 1908년 음력 8월 18일 이학로 와 함께 부하 18명을 이끌고 산청 군 계량곡(計量谷)에서 수비대와 교 전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박동의 의병대는 산청군 일대에 서 지속적인 의병 투쟁을 전개한 것 으로 판단된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인 이학로는 박동의 의병대에서 도선봉의 직책 을 지녔다. 이학로 휘하의 부장으로 황낙현(黃洛賢), 노성화(魯成和, 중 군장), 최경순(崔敬順, 초모장), 박매 지(朴每之) 등이 있고 기타 주요한 인물로 우수보(禹守甫, 해산군인), 윤일이(尹一二, 권석도), 전재수(全在守), 심상근(沈相 斤), 이춘이(李春伊), 김채홍(金采洪), 송명운(宋明云)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박매지는 1908년 7월 4일 평촌 부근에서 부하 3명과 함께 일본군 토벌대 에 붙 잡혔다가 윤일이와 함께 탈주한 바 있다. 윤일이는 1909년 10월 진주에서 일경에 다시 체포되었으며, 경남 양산시 상북면 좌상마을 서병희 의병장 추모비 하동시 의신마을의 의병총. 1908년 2월 2일 거창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온 의병 대와 일본군경의 합동토벌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15~20명의 의병들이 전사했 다. 이후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조성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