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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민종식 의병장 49 1893년과 1894년에는 고종을 곁에서 모 시는 도승지를 맡는 등 탄탄대로의 관료생활 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겪 고 난 후 관직을 버리고 어려서부터 살던 충 청도 정산(현 충남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으 로 내려갔다. 이후 명성왕후의 국장에 참례 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1904년 한산 이씨 이은식(李殷植)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 다. 부인은 후일 홍주의병의 동지인 이용규 (李容珪)의 이복동생이며 안동관찰사를 역임 한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종제(從弟)였 기에 후일 의병항쟁과 연계되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처남인 이용규와 이남규는 의병 동지가 되어 힘을 보탰다. 군자금 2천원 마련, 홍주 의병장 되어 합천 · 남포 전투 등 치러 낙향 이후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마침 을미의병 당시 홍주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 교의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安炳瓚)이 홍 성, 청양 일대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설은 민종식에게 편지를 보내 1895년 의병을 일으킬 때 통지하지 못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면서 의병을 이끌어줄 것을 권했다. 1906년 2월 하순경 안병찬, 박창로, 이용 규 등은 그의 집인 정산 천 장리까지 찾아 와 의병대장이 될 것을 요청 했다. 이에 이 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병대장 자리에 올랐 다. 그 뒤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 원을 마련 하고 군수품으로 제공하였다. 이어서 의병부 대의 근거지를 자신이 거주하는 정산군 천장 리로 삼고 의진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1906년 3월 15일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 시면)에서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이때 참 석한 의병은 6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의병 들에게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잡 아오면 머리 하나에 1천 냥을 상금으로 주겠 다고 하면서 홍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 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 게 되자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다 음날 이세영(李世永)이 의진에 도착하였다. 홍주 을미의병에 참여한 후 정식 군대에 들 민종식 고택(충남 청양군 천장리) 민종식 친필 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