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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창숙 선생 49 아들 환기(煥基: 당시 20세)가 경찰에 체포되 어 고문을 받은 끝에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창숙은 병이 악화 되어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그곳에서 일본 영 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 듬해 대구지방법원에서 14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 때 받은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으며 병도 크게 악화하였다. 1929년에는 생명이 위독 하여 형(刑) 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가 재수감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치열한 옥중투쟁을 계속하여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 지 않는 의연한 모습과 기개를 보였다. 1940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 요구를 완 강히 거부하였다. 고향 성주에서 요양중이던 1944년에는 다시 독립운동조직인 건국동맹 의 남한책임자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 나 해방직전인 1945년 8월 7일 건국동맹 가 담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해방을 맞이 하여 왜관경찰서에서 풀려났다. 광복 후 전국 유림 결속하여 유도회(儒道 會) 조직하고, 성균관대학 세워 해방 이후 그는 신탁통치 반대투쟁과 남한 만의 단독선거 반대투쟁 등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또 그 는 성균관에서 부일 ‘황도유림(皇道儒林)’ 축 출에 앞장섰으며,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맡아 교육운동에 투신 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과 독재에 항거하다가 1957년에는 일체의 공직 에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특히 그는 1959년에 이대통령의 사퇴권고 서한을 보내 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다. 결국 김창숙 은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을 고수한 진보적 유학자요 민족주 의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62년 3월 1일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투 철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 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이 해 5월 10일 서 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서거하였 다. 김창숙 재판 판결문 김창숙의 형 집행정지 출옥 보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