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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기삼연 의병장 49 고을에서도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 고 동참함에 따라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진주의 노응규 의병부 대를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가 그 여세를 몰 아 진격해 오고, 또 학부대신을 역임한 신기 선이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파견되어 의 병부대의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기우만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의 병부대의 해산에 극력 반발하였다. 그 뒤 선 생은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던 중, 의병을 일 으켰다는 죄목으로 전주진위대의 군사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주에서 서울의 평 리원으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약 보름 동안 감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평리원장 이 용태의 배려로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연합 의병 지휘부인 ‘호남창의회맹소’ 결성 이후 대한제국의 운명은 갈수록 기울어져 갔다. 특히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에 이어 2월 23일에는 전쟁에 필요한 정치적, 군사적 지점을 제공한다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었다. 이어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지면서 외교권과 재정권도 서서히 일본 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을사조 약’이 강요되면서 사실상의 준(準)식민지 상 태가 되어갔다. 더구나 1907년 8월 한국 군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해산됨에 따라 높은 전투역량을 지닌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운동에 투신하 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의병전쟁은 전국적이 며 전민족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하여 갔고, 의병부대의 전투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기삼연 또한 군대해 산 이후 의병항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분 연히 동지들과 함께 일어났다. 즉 1907년 음 력 9월 영광 수록산에서 의병봉기의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호남 각지에 서 봉기한 의병부대들을 규합하여 ‘호남창의 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연합 의병 지휘 부를 결성하고, 항전준비를 완료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 편제를 완료함과 동시에 선생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항쟁을 촉구하면서 병사 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광무황제(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봉기 사실 을 알리고, 『대한매일신보』사에도 글을 보내 의병항쟁을 후원하고 지지할 것을 적극적으 로 권유했다. 각 의병장 중심으로 편제된 부대, 맹활약 펼쳐 기삼연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는 초기 기삼연의 서한(1895년, 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