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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4년 12월 Special Theme 정의부 창립 100주년 기념 특집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진공’ 있었다. 이들은 자체 무장력도 확보하고 있었고, 관 련자 중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변절자들도 가담 하고 있어 독립운동 진영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 었다. 국민부에서는 환인현에서 200여명의 한인 농민들 을 동원해 3차례의 시위를 전개하며, 환인현 일본영 사관 파출소의 철수와 한교동향회의 해산을 주장하 였다. 통화현에서는 양세봉이 휘하의 병력을 동원해 한교동향회의 총본부를 습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이 에 일제는 향후 한교동향회의 존속은 5,000원의 보 조금을 지급해 줄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하고 있었으 며, 결국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밖에 국민부에서는 1929년 11월 30일에는 북 간도 연길현 옹성라자에서 간도 일본총영사관 경찰 서에 근무하는 경부보 츠보이 미요지[坪井三代治]를 총살하였다. 또 1930년 4월 6일에는 연길현 용정(龍 井) 시외에 사는 밀정 심용해(沈容海) 부자를 사형선 고장을 소지한 조선혁명군을 파견해 처단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1932년 4월 14일 신빈현 (新賓 縣, 구 흥경현) 왕청문(旺淸門) 내 영국인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던 밀정 황규청(黃奎淸)을 처단하였다. 그 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왕청문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설립을 준비하던 박노근(朴魯良), 김봉수(金鳳洙), 최 일화(崔逸化) 등 10여 명의 친일분자와 영사분관 파 견원 2명이 위기를 느끼고 피난하였다. 1934년 8월 에는 집안현에서 초산경찰서 순사를 지냈던 김용흥 부부와 그 가족을 처단하였다. 만주와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과 국내공작 활동 1931년 9월 만주사변(일명 9 · 18사변)이 발발하 자 국민부에서는 일본군의 동향과 국경지역의 상황 을 파악하는 한편, 다양한 방법으로 군자금을 획득 하고자 노력했다. 1932년 8월에는 무순신둔(撫順新 屯) 부락의 경비상황을 조사하던 국민부원 3명이 무 순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11월에는 상인으로 변장한 국민부원이 관전현 대청구(大靑溝)에서 압록 강 대안을 왕래하며 일제 관헌의 경비상황을 내사하 중국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에 있던 국민부의 구 청사(독립기 념관 제공)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 (국가보훈부 제공) 국민부 지방집행위원 양기하 (호는 하산, 또는 인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