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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대구광학회와 대구광문사의 구성원을 보면, 그 회 원의 성향에서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전 관 찰사 이근호와 연결된 대구광학회 회원들은 대구·경 북 지역의 향리 출신 및 유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 었고, 반면에 현 관찰사 신태휴와 연결된 대구광문 사 회원들은 관찰부와 밀착된 대구 지역의 상인 출 신들과 그 추종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 대구광문사,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는 회명을 대동 광문회(大東光文會)라 고치고, 회장은 박해령, 부회장 은 사장 김광제를 선출하였다. 그 회원은 장상철 · 강 영주 · 심정섭 · 김우근 · 서병오 · 윤하선 · 정재덕 · 이종 정 · 길영수 · 이우열 · 강신규 · 정규옥 · 추교정 등이었다. 대구광문사 문회(文會)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 면서 1907년 2월 21일 북후정 민중대회를 개최하기 로 하였다. 그리고 서상돈 등은 우선 인민대의소와 대구시의소를 기반으로 한 대구민의소를 조직하였 다. 대구민의소는 북후정에서 개최된 대규모의 민중 대회를 주도하였다. 이날 공식적으로 발족한 대구단 연상채회는 대구민의소의 조직을 변경한 것이었다 . 대구민의소의 조직을 변경하여 설립된 대구단연 상채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서상돈 등의 대구광문사 계열의 상인들과 전직 관료들이었다. 대구광학회 계 열의 전 경주 군수 이현주(李玄澍)가 의장을 맡았으 며, 대구광문사 계열의 상인 정재학이 부의장, 정규 옥이 총무, 그리고 경주 군수와 경상북도 시찰을 역 임하였던 김병순(본명 김윤란)이 서상돈과 함께 재 무를 맡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대구광학회 계열에서는 전 경주군수 이현주가 참여하여 대구단 연상채회 의장을 맡긴 했으나 이일우를 비롯한 대구 광학회 계열 인사들의 참여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은 1906년 1월 대구광문사와 1906 년 8월 대구광학회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 였고, 자치기관인 인민대의소와 대구시의소를 설립 하여 민권의 신장과 민중 의식의 성장을 목표로 삼 았다. 1906년 1월 사범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인이나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 다. 그 신분은 지주 및 상인, 전 · 현직관인, 경상감영 영리, 그리고 유생이었다. 『황성신문』에 실린 「대구사립중학교 교감 윤영섭, 사범학교 학감 김용선 기서(寄書)」 기사( 1906.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