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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동북항일연군과 북한정권의 수립 47 을 보좌하는 실무집단으로 활용되었다. 북한 정권 수립기의 88여단 출신 인사들 이들 88여단 그룹은 점령군인 소련군의 막강한 배 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기부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북한의 각급 당과 지 방 정권기관에는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연계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평양에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이 버티고 있어 그들의 입지는 넓지 않 았다.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1945년 10 월 7~11일 5도인민위원회연합회의를 개최하여 북 한의 중앙정권 수립 문제 논의를 제안했으나, ‘5도 행정국’이라는 임시 협의기관을 창출하는데 그쳤다. 이 대회에는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참 가자 111명 중 88여단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 기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10월 13일 조선공산 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됨에 따라 그 집행위원 17인이 선출되었으나, 88여단 관계자는 평안남도를 대표한 김일성, 평양시를 대표한 김책과 고려인 이동화 등 총 3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88여단 혹은 조선공작단 출신 인사들은 각 자의 연고지에서 평양으로 귀환하여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함흥에 파 견되었던 김책은 1945년 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의 위원으로, 1946년 2월 군사교육기관인 평양학원 의 초대 원장직에 취임하였다. 장춘으로 향했던 최 용건은 10월 귀국하여 조선민주당 부당수로 선출됨 과 동시에 5도행정국 보안국장을 맡았다. 신의주로 파견되었던 김일은 평북도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 였지만, 동시에 북조선분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 앙정계로 진입하였다. 함북 청진으로 파견되었던 안 길은 1946년 7월 평양정치학원 원장, 9월에는 보안 간부훈련대대부 참모장으로 배치되었다. 그 외 88여 단 출신인 김경석은 평안남도 진남포, 김증동은 평 양학원, 최춘국은 함경북도 온성, 박장춘은 황해도 안악에서 활동하였는데, 연고 지역의 공산당 지구당 과 인민위원회에 파견되거나 적위대, 보안대, 국경 수비대, 철도경비대 등 군사 및 경찰, 보안 기관 조직 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중앙과 지역의 군, 경찰, 보 안 등의 물리력을 장악하면서 여타의 정치집단에 비 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편 88여단 출신 인사들은 응집력의 측면에서도 여타 정치집단과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었다. 그들 은 장기간의 생사를 건 무장투쟁을 함께 다진 강한 결속력이 있었고, 소련 야영에서 2~3년의 교육 훈련 을 함께하며 정치이론과 세계관의 동질성을 확보한 집단이었다. 이러한 남다른 응집력과 결속력을 토대 로 88여단 출신 인사들은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반 중앙정계의 핵심으로 부상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북한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성균관대 강사 등을 역임하고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북한의 안중근 인 식변화와 재평가 과정」, 『동북아연구』(조선대학교 동북아연구소) 29-1, 2014 ; 「한국전쟁기 북한의 인민군최고사령관 제도의 도입과정과 의미」, 『사림』 65(수 선사학회), 2018 등이 있다. 필자 윤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