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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재일조선인 민족운동과 2 · 8독립운동 47 원칙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11월 세계대전도 휴전 되었고,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유 럽 여러 민족의 독립이 선언되고, 민족자결주의, 민 족 독립의 기운은 세계의 식민지 · 종속국의 민중에게 큰 자극과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박경식[최가 진 역], 『재일조선인운동사-8.15해방 전』, 95쪽). 둘째, 박경식은 러시아혁명만이 아니라 먼저 재미 동포 사회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여기에서 그는 민 족자결 원칙의 적용 문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재미조선인 사이에서는 민족대표를 선출하고 동 포에 독립을 호소함과 동시에, 미국 대통령에게 독 립청원문 제출,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등을 결의 하고 운동자금 등을 모아 실행에 착수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민족자결의 원칙은 동유럽에만 적용되 는 것으로서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 에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은 실현되지 않았다(위의 책, 95~96쪽). 셋째, 상하이 조선인 사회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여운형의 신한청년당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그들 의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 상해에서도 여운형 등의 신한청년당이 독립운동 을 전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 및 전 민족 적인 독립운동을 진행하기 위해 조선, 간도지방, 일 본 기타 각지에 대표 파견 등이 결정되었다(위의 책, 96쪽). 이런 국제주의적 관점과 한민족의 해외에서의 활 동에 주목하는 내용은 2 · 8독립운동의 위상을 이야 기하는 한 포인트가 되어 왔다. 넷째, 1910년대 국내와 달리 일본은 다양하고 국 제적인 소식을 빠르고 다양한 형태로 접촉할 수 있 는 공간이었다. 재일조선인 유학생은 그 기회를 적 극적으로 살려 여러 정황을 파악했고, 이에 기초해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아갔다고 보았다. 재일조선유학생들은 도쿄에서 발행되고 있었 던 12월 1일자 『재팬 어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ser』지에 실린 재미동포 대표가 민족대표로 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다는 기사와 12월 14일자 『도쿄아사히신문』의 샌프란시스코 재주 동포가 독 립운동자금을 30만 엔 모았다는 기사에 크게 자극 받아 이에 호응해 조국광복, 독립운동을 일으킬 절 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박경식, 위의 책, 96쪽). 다섯째, 박경식은 2 · 8독립운동에서 도쿄조선유학 생학우회에 주목했다. 사실은 절대적이었다. 박경식 은 이 조직의 움직임, 각종 모임, 특히 망년회, 웅변 대회 등에 주목했다. 도쿄조선유학생 학우회 주최로 12월 29일 간다 [神田]의 메이지회관에서 망년회, 다음 날 30일 도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동서연합 웅변회를 열고 (군중 약 400명), 그곳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독 립문제를 의제로 내세워 토의했다. 윌슨의 민족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