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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외교독립운동 47 의 위임통치 청원은 대통령으로서의 자질과 신뢰에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즉각적인 독립은 불가능하다 는 현실 인식을 가진 대통령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는 미주 한인 들로부터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 하지 않고 대부분 구미위원부의 운영 경비로 사용했 다. 외교 선전 활동에서도 주로 미국에 초점을 맞추 어, 친한 여론 조성과 미국 의회로의 접근에 주력했 다. 그런데 미국 선교단체들이 새로 부임한 사이토 [齋藤實] 조선총독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미국에서의 배일(排日) 여론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 황에서 구미위원회의 외교 전략과 노력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임시정부 설립 초기부터 제기된 이승만에 대한 반 대 목소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20년, 대한민 국임시정부의 차장들은 사퇴를 각오하고 대통령불 신임안을 결의했으나, 임시정부의 분열을 우려한 안 창호의 강경한 반대와 내부·외부적 상황으로 인해 해당 안건은 철회되었다. 1921년 워싱턴에서 개최 된 태평양회의는 세계 평화를 목표로 군축 문제와 태평양 및 원동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승만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외교 독립을 위한 새로운 기대로 가득했다. 그러나 한국대표단은 본회 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한국 문제가 의제로 상정되 지도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태평양회의에서도 성과를 내지 못하자 외교독립론을 중심으로 한 이승만의 운 동방략과 임시정부의 방향성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임시정부는 침체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 분을 수습하고 민족운동 진영을 재정비하려는 노력 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1923년 임시의정원은 대통 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서를 제출했고 결국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은 탄핵 면직되었다. 임시정부 개혁의 목소리와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주요 논란거리로 떠올랐 다.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이승만의 선의에서 비롯 된 것이며,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 능력을 시험하 려는 도전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독립운동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당시부터 의견 이 분분했다. 특히 이승만이 위임통치 청원을 했음 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는 사실과, 이후 단 한 번도 위임통치 문제에 대해 공 개적으로 사과하거나 철회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은 그를 둘러싼 비판을 더욱 키웠다. 이러한 논란 은 이승만의 리더십과 독립운동 방향성에 대한 신뢰 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필자 이혜린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상해 프랑스 조계 당국의 한인 정책 연구 (1919~1937)』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 사학과 강사,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이다. 『백범의 길 : 임시정부의 중국 노정을  밟다 – 상』, 아르테, 2019(공저) ; 「3 · 1운동 직후 한인의 상해 망명에 대한 프랑스  조계당국의 인식과 대응」, 『사림』 75, 2021 ; 「재상해 한인의 국적문제와 일본 · 중 국 · 프랑스의 대응: 1933~1934년 김석(金晳)의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연구』  50, 2024 등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