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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근대 대구의 애국계몽운동과 그 한계 47 기 직전까지 유생 김진수·김호규 등의 권유로 경 북 41군에 사립 보통학교 설립을 계획하였고, 교 체된 뒤에도 학교 확장 사업비 1천 원을 지원하 는 등의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신임 관찰사 신태 휴가 각처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계몽 사 업을 전개하면서 신태휴의 공적은 인정되었으나 이근호가 재임 중에 유생들과 함께 기울였던 노 력은 흔적 없이 사리지게 되었다. 1906년 4월 서울에서 교과서의 편집 간행을 통해 학교와 교육을 진흥하고 학술을 전국에 널 리 펼치기 위한 단체로 광학사(廣學社)가 설립되 었다. 이때 전 경북 관찰사 이근호는 서울에서 설립 된 광학사의 찬무원에 선임되었고, 김진수·김호규와 같은 경북 출신의 재경 인사들이 이근호의 후원 아 래 광학사에 참여하였다. 1906년 4월 이근호는 『국민신보』에 여러 차례 “신 태휴가 학교를 설립한다고 칭하고 각부 인민들에게 늑염하여 착복했다.”는 투서를 하였다. 이에 대 해 관 찰사 신태휴의 지원 아래 교육과 계몽사업에 참여하 고 있던 대구광문사 소속 유생들이 상경하여 항의하 는 등 반발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대구광학회와 대구광문사의 반목과 대립은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났다. 『대한협회대구지회회록』(제1호), 1908(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교남학회 관련 기사 「교남학회」(1908.3.10) 달성친목회 및 강유원에 대한 순사 박준영의 감시보고 「복명서」 (1919.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