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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백두산 주변의 주요 독립운동과 유적지 47 (通化市誌)』와 교회사 등에서 “동관이 옛 통화시의 동문”이고 당시의 “야소교회당은 현재 통화시 동 창구 신화대가 73호이며 3층으로 증축된 동창구 기독교회이다. 신화대가 4거리에서 통화시 인민 병원 방향으로 개천을 따라 100여m 거리에 있으 며 당시 일본영사관은 1㎞정도 거리에 있다.”며 그 지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김필순은 일제가 통화에 일본총영사관을 세우 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시와 압박을 가해 오자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에 기지를 개척하 고자 했다. 1916년 내몽고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만주를 떠돌며 소작 하는 한인동포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제공하고 농 기구를 배분하려는 개간에 착수했다. 이에 100가 구(1,0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들었다. 치치하얼 시 관(市官)병원 의사로도 복무하게 된 김필순은 러시아 군의관의 직함으로 활동하며 국내에 있는 가족을 불 러 치치하얼 시내의 시관병원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따로 관사에 개인병원을 운영하였다. 그리하여 흑룡 강성(북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함 으로써 치치하얼 부근에도 새로이 독립군 기지가 마 련되었다. 그러나 1919년 9월 1일, 고된 수술을 마친 김필 순은 일본인 조수가 건넨 우유를 마시고 급서하였다 (병사설도 있음). 남편이 죽자 부인은 가족들에게 위 해가 닥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독립운동의 흔적이 될 만한 모든 자료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나중에 일 본총영사관 경찰들이 김필순의 집을 급습하여 수색 했으나,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아 가족들은 안전 할 수 있었다. 필자 강위원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하고 1989년에서 2010년까지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를 지냈다. 대구사진비엔날레 창설을 주도하였고  조 직위원, 운영위원장, 큐레이트 등을 역임하였다. 1995년 「광복50주년기념-백두산 4계와 야생동식물전」을 기획하고 참여하는 등 3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백 두 산』, 『두만강-백두산 천지에서 우리땅 녹둔도까지』, 『오늘의 조선족 1990-2015』 등 18권의 저서와 사진집을 출판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의 김필순(오른쪽 아래, 그 위는 여동생 김순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