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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20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다 47 로는 군사 모집과 훈련이 선행 된 이후 개전(開戰) 할 것을 강 조한 것이다. 요컨대 안창호가 말하는 독립전쟁은 ‘통일적 행 동’, ‘훈련과 국민개병주의’를 통한 철저한‘전쟁 준비’가 전제 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안창호는 언제부 터 독립 전쟁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것일까. 그가 임시정부 각료 로 취임하기 직전에만 해도 외 교와 실력 양성이 선행되어야 할 독립운동 방략이라고 보았 다. 안창호를 실력양성론자 혹 은 외교론자로 보는 시각이 여기에 연유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장투쟁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단지 당시 국제적 상황 속에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따져봤을 뿐이다. 즉 안창호의 독립운동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다만 모든 것에는 때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무장투쟁을 반대하는 것처럼 비추어 진 것이다. 이동휘의 임시정부 합류, ‘독립전쟁’ 방략에 기폭제가 되다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밝힌 ‘독립전쟁’은 안창호 혼자 만의 생각이 아닌 국무원 회의를 거쳐 완성된 방략이었 다. 앞선 1920년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안 즉 대정방침안 (大政方針案)을 세우기 위한 회의가 국무원에서 여러 차례 진행되었고 그 결과 ‘독립전쟁’이 결정된 것이다. 여기에 는 노령(露領)과 북간도(현재 중국 연변지역) 민족운동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 기념 촬영’ 사진(1920.1.1, 독립기념관 제공). 두 번 째 줄 가운데에 이동휘와 안창호가 앉아있다(독립기념관 제공).  1920년 1월 17일 발행된 『독립신문』 제38호. 임시 정부는 국민개병의 원칙을 밝히면서, 1920년 한해를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뜻을 공포했다(KBS- TV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