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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민족 독립을 위한 삶,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47 로스앤젤레스에 거류하는 한인 부인들도 1917년 11 월 ‘부인친애회’를 조직하 고 그해 12월 20일 통상회 를 열어 회장 이하 각 임원 을 선출하였는데, 조직 목 적은 부인의 미덕과 수양을 쌓는 부인 간의 친애 도모 에 있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도산 은 1919년 4월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 (上海)로 갔다. 이혜련은 남 편이 대한인국민회를 대표 하여 중국으로 갔기 때문에, 다시 혼자서 가족을 돌봐야만 했다. 도산은 1919년 4월 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아내에게, “덕이 많으신 당 신은 여러 여자에게 모범되도록 힘쓸 줄을 믿나이 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미주지역에 전해진 이후 한인여성들도 3‧1운동 을 후원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다 바쳤다. 다뉴바 의 ‘신한부인회’도 그렇고, 이혜련이 활동하고 있 었던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에도 임시회를 소집하고 독립운동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를 결 의하였다. 도산의 마지막 부부생활 도산은 중국에서 1921년부터 3년에 걸쳐 임시정 부와 독립운동계를 통일하는 사업을 하였지만 실패 로 돌아가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 착하였고, 6년 만에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아내와 아 이들을 만났다. 안창호 · 이혜련 부부와 장남 안필립(동그라미), 차남 안필선 도산 가족이 살았던 흥사단소에서 열린 흥사단 제3회 연례대회(1915, 첫줄 가운데 안창호, 오 른쪽 끝 이혜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