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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간토(關東) 조선인대학살과 ‘박열사건’ 47 했다. 최종 판결은 첫 공판 한 달만인 3월 25일에 열렸 다. 마키노 재판장이 입장하여 전원 기립을 명했으 나, 두 사람은 일어서지 않았다. 재판장은 “황실에 위 해를 가하려는 행위”를 인정해 두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박열은 조선어로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 다”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외쳐 법정을 소란케 했다. 그런데 일본 검찰은 10일 만에 돌연 검사총장 명 의로 사법대신에게 사형에서 한 등급 감형해달라는 「 은사(恩赦)신청서 」 를 제출하였다. 신청 사유는 두 사 람의 폭탄 투척 대상이 꼭 황실에 해당하지 않고, 실 현 가능성도 희박했다는 것이다. 사형을 집행할 경우 조선에서의 항일투쟁이 더욱 격렬해질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 정부는 1926년 4월 5일 내 각 총리대신 명의로 두 사람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 로 특별 감형시켜달라는 은사를 신청했고, 곧 사면장 이 발표되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은사장을 받자마자 형무소장 앞에서 찢어버렸다.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의 문의 죽음을 당한 후 옥중에 수감 중이던 박열과 가 네코 후미코가 다정한 포즈로 찍은, 이른바 ‘괴사진’ 과 ‘괴문서’가 폭로되면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대역사건’을 합리화할 충분한 증거나 진술 을 갖지 못해 고심하던 다테마쓰 예심판사가 박열의 환심을 사기 위해 후미코를 불러 함께 사진을 찍게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담당 판사가 파면을 당하였고, 와카츠키 내각이 붕괴되는 등 파장을 불 러일으켰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반천황제(反天皇制) 의열 활동과 법정투쟁은 일본 천황제 국가존립에 큰 위협 적인 사건이었다. 법정에서 포옹한 박열과 가네코(동아일보, 1927.1.21.) 필자 김명섭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강사 ·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등을 지내고 현재 단국대학교 자유교양대학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 국근현대사학회 연구이사,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도 맡고 있다. 『대일항쟁기 민족지도자들이 꿈꾼 나라』(2021,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한국사가 기억해야할 용 인의 근대 역사인물』(2018, 노스보스), 『한국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이학사, 2008) 외 다수 저서와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