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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창숙 선생 47 두루 찾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특히 김창 숙은 성주 한개마을의 이승희에게 많은 감화 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이승희를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을사5적 처단 상소, 국채보상운동과 교육 구국운동에 뛰어들어 그리하여 1905년 을사5조약이 일제의 강 요로 체결 · 공포되자, 이승희와 함께 서울로 가서 조약에 참가한 을사5적을 목벨 것을 광 무황제(고종)에게 상소하였다. 하지만 아무 런 회답이 없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통 곡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다. 1908년 30 세 때에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회복하고자 애 국계몽운동 조직의 하나인 대한협회(大韓協 會)의 성주지부를 결성하고 총무를 맡아 낡 은 구습타파와 차별적 계급타파운동에 앞장 섰다. 이듬해에는 '한일합방론'을 제창한 매 국노 송병준(宋秉畯) · 이용구(李容九) 등을 성 토하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하였다. 이 일로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또 1910년 초에는 향리의 청 천서당(晴川書堂)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敎) 를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투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나 라가 망하자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큰 치욕이다"라고 외치 면서 매일 술에 취해 통곡했다. 이후 타락하 고 방종한 생활을 자초하니 주위에서는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913년 방탕한 생활 끝에 귀가한 그는 모친의 엄중한 꾸짖음을 받고 스스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게 되었다. 이후 집에 있는 경서와 각종 서적을 섭렵하 고 독서에 열중하며 1919년 3 · 1운동 직전까 지 학문에 열중하였다. 실로 그의 학식과 평 생의 지조는 이때 그 기반이 잡혔던 것이다. 유림 작성 파리장서 번역,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토록 해 김창숙은 1919년 2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태영(成泰英)의 연계로 3 · 1운동을 주 도한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 경북 성주 김창숙 생가(사랑채) 김창숙이 성명학교를 운영했던 청천서당 건물